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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5. 16

하루하루 / 2012/05/16 23:11
1.
머리 속에 있는 정보들이 이온상태로 떠돌다가 전기분해 되고, 금속결합을 하였다가 다시 이온상태로 바뀌는 그런 때가 있다.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질 듯 하다 해체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반복되면 힘.들.다.

무엇보다 대전제를 제 손으로 무너트리는 단계까지 사고가 진행될 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사유의 속도가 사유의 과정을 판단하는 이성의 속도보다 앞서게 될 때. 내가 내 머리를 통제하고 있지 못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왜 효율적인 방향으로 두뇌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

2.
상대음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가 8살이었는데, 당시 들리는 소리를 계이름으로 바꾸며 신나던 기억이 있다. 악보 그리는 법을 몰랐던 탓에 음의 높낮이와 박자를 표기하는 법을 혼자 개발해 나만의 기보법(?)을 개발했던 것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좀 무식한 기호였는데 구체적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집에 라디오가 있던 게 아니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음악이 아닌 소음이라든가, 사람들의 대화를 계이름으로 바꿔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말하는 '밥 먹어라'는 어떤 음계로 이루어져 있고, 중국집 아저씨가 말하는 '학교가니?'는 어떤 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음에 맞춰 말하지 않는다. '음'이라는 건 소리의 진동수와 관련이 있고, 그 중 일부 영역을 한정지어(비례 관계에 의해) 음으로 지정한 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에서 벗어난 소리들이 세상에는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음이 아닌 소리까지 음으로 인식했던 것일까?

오랫동안 이 문제를
'절대음감이 아니며, 상대음감 역시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 이라 해석해왔다.
그런데 몇 달 전.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게 되었다.
소음처럼 들리는 소리들이 음악에서 사용하는 B, C, F와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음 사이의 비례관계는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계이름으로 환산하였던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음악에서 사용하는 값은 2와 3인데, 나는 0.6과 0.9를 듣고서 이것을 2와 3으로 변환하여 음으로 파악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음악에서 사용하는 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들어도 이것은 솔이고 저것은 레라고 할 수밖에 없는거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이 0.5나 2.5와 같은 비례로 들리니 이런 생각을 더욱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옥타브의 정의를 지금과 같은 1:2가 아닌 다른 수로 정의한 후 그것들을 12음으로 나눠 음을 정한 후 연주를 하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재미있겠는데? 이런 거 실험한 사람 없나?

각종 생활 소음이라든가, 대화, 노이즈 등으로 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있다는 건 아는데, 그 사람들은 그럼 이런 관점에서 소리들을 조합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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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소

* 이것은 영화분석법에 대한 글이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체계화 하고, 이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포스트입니다. 글과 그림은 계속 수정될 예정입니다.

................................................................................................................................................................


 


영화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영화의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떤 부분을 비교하며 분석하고 평가할 것인가. 선택은 다양하다.

 


가장 쉬운 접근은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고, 그의 행동과 말을 수집해 그를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쉬운 경우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영화에는 단순한 인물부터 모순투성이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까지 온갖 인간상이 충돌하며 점화한다. 마치 내 주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영화 속 인물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접근법 중 하나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 많은 영화 리뷰들 중 상당수는 인물평가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그를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합당한가 하는 결정으로 채워 진다. 영화 속에서 착한 사람은 누구인지, 누가 악역인지. 사람들은 그런 걸 구분하길 좋아하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영화 내부의 세계(환경)에 주목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SF나 무협, 공포물과 같은 장르가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무협은 수련을 통해 기(氣)를 운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과장한 세계 위에서 구축된 장르다. 
비과학, 초과학의 이론이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세계관에서 대단히 많은 영화들이 고유의 세계를 구축한다. 현실 세계와 극명하게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는 영화들로부터 그 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 보는 것으로 훈련을 시작한다면, 현실과 유사한 세계관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느와르나 스릴러물에도 고유한 세계관과 각자의 규칙이 존재한다. 물론 인물은 고유의 정체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세계일 수 있다. 영화 내부의 세계를 분석하는 작업은 영화를 독립된 게임이라 가정하고,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과 유사하다. 이긴 사람이 모든 상금을 차지하는 게임인지. 누가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가를 놓고 경쟁을 하는 게임인지. 혹은 숨겨 진 보물을 누가 더 많이 찾는가로 우승자를 정하는지. 게임 설명서가 없는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한 후 스스로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방식의 해석을 영화에 적용할 수 있다.

 


세계를 관찰하는 현미경 렌즈를 높은 배율로 변경하면, 평범한 영화 안에서도 그 영화 내부의 세계를 분리해 관찰할 수 있다. 인물의 가정 환경이나 성장 배경을 유추한다거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시대적 배경 등. 인간보다 인간의 외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그림 1]부터 [그림 6]까지.


[그림 1]은 다시 [그림 7]로 변형이 가능하다. 

 


(설령 논픽션이라 하더라도) 영화의 모든 인물은 가상의 존재다. 다큐멘터리에도 카메라의 시점과 편집은 존재한다. 영화 속 인물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하물며 픽션은 더하다. 영화의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와,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와 감독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다. 그래서 인물을 만든 사람과 연결시켜 분석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감독은 왜 이 인물을 이러한 형태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도록 했을까?’ 질문과 함께 영화를 지켜 보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인물을 관찰하는 방법이 [그림 8]에 해당한다.
 



이것은 작가론이나 감독론과 같은 분석법으로 확장된다.
누가 왜 인물을 만들었으며, 이렇게 행동하도록 조종하는가 라는 관점의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
스티븐 스필버그의 주인공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라든가,
“‘
크리스토퍼 놀란영화의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다크나이트-배트맨)’코브(인셉션)’의 유사성과 차이는?”과 같은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 4]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영화에서 세계(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은 영화 내부의 세계와 영화 외부(즉 현실 세계)의 세계로 나뉠 수 있다.
이것을 [그림 9]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영화 내부의 세계는 앞서 말한 내용에 해당된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으며, 게임의 규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영화 외부(현실 세계)의 세계와 영화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법은 조금 어려울 수 있다. 일단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세계 + 현실이 둘을 인식하고 있어야 이 영화는 현실의 무엇을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까?’ 혹은 이 영화에서 현실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비교적 수월한 영화는 정치전쟁’, 그리고 시대극이다. ‘시대극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관이 삽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역사관역사를 바라보는 현재의 눈이 된다. ‘전쟁영화는 더욱 쉽다. 싸움이라는 것에는 싸움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싸움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싸움을 누가 시작했는가,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이 뒤따른다. 전쟁 영화에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이(그 영화만의) 마련되어 있다.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진행하게 되면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또는 현재의 무언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를 세울 수도 있다. 14세기 십자군 전쟁을 다룬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여러 편 제작되는 이유를 현재의 중동 정세와 연결시킨다거나, ‘다크나이트의 흥행이 미국 대선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와 같은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다른 선택도 있다. 과거의 작품을 해석할 때, 그 작품이 제작된 시대의 기준으로 작품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작품을 해석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민케인] 1941년의 시대적, 기술적 배경 안에서 평가할 때와 2012년인 지금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1968년의 무언가를 찾아낼 수도 있지만, 2012년의 무언가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이제 이 4가지 방법을 하나로 결합하도록 한다.
4
가지 요소를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11]로 나타낼 수 있다.




영화를 읽는 방법은 위의 그림에서 하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두 개 이상의 영역이 겹쳐지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인간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고, 과거와 현재 역시 분리 되어 있지 않다. 단 하나의 시각으로만 영화를 해석하는 건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1]에 하나를 더 추가해 본다. 바로 관객인 당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다고 하는데 난 재미가 없는 영화. 모두가 신파극이라며 비난할 때, 차마 반론을 재기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추억이 겹치는 통에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던 기억. 영화를 통해 당신은 다른 사람과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영화에서 찾아보는 거다. 조금 더 나아가면 영화를 보던 중 떠오른 생각과 기억, 영화와 관련된 일화를 중심으로 글을 써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당신의 기억이나 경험, 취향, 기호, 온갖 특수성이 당신에게 이 영화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 것이다. 바로 그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화에서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도출할 수도 있다.


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심리학이 아닌 집단의 심리학, 혹은 인류의 보편적인 원형에 접근하려는 시도. 역사 이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어져 온 신화와 이야기, 상징들의 힘에 기대어 영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들. 이러한 접근은 영화를 해체하고, 그 구조를 단순한 몇 가지 범주로 묶는 방식으로 영화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맞닿게 된다.




그러나 [그림 14]에는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지금까지 나온 관점들은 영화가 아닌 대상에도 적용 가능한 기준들이었다. 이것은 문학비평에 적용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문학으로서의 영화'에 국한된 키워드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림 15]에 사운드, 미술, 시각효과, 편집, 카메라 시점과 같은 영화의 Style과 형식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추가해야만 하다.

카메라 시점을 삭제한 채 [클로버필드]를 말할 수 없고, 미술적 평가를 논외로 한 채 타셈 싱감독의 영화를 평가 할 수 없다. 만약 [도그빌]이 지금과 같은 디자인 세트에서 촬영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울림을 줄 수 있었을까? 여주인공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도그빌에서 부당한 폭력과 착취를 당한다. 감옥처럼 공간이 축소된 도그빌은, 모든 건물의 벽을 없앤 후 그 자리에 주차장 안내선 같은 경계만을 표시하고 있어, 폭력의 현장을 마을 주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처리한다. 물론 배우들은 마치 벽이 존재하는 양 연기하며, 그레이스가 목에 쇠사슬을 한 채 끌려 다니는 모습을 매 순간 목격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연극을 영화화한 것이긴 하지만) [도그빌]에서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인물이나 이야기 못지 않게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무대의 디자인은 관객에게 폭력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가, 목격하지 못하는 것인가, 혹은 보지 못한 척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또 다른 예로 [E.T.]는 어떨까? [E.T.]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스필버그가 아닌 크로넨버그가 감독을 했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크로넨버그였다면 소년과 외계인 사이의 우정이 아닌, 동성애적 코드라든가 성적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는 공포물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E.T.의 디자인을 [에이리언]을 디자인한 기거(Hans Rudolf Giger)’가 담당했다면 감독과 배우 등 모든 요소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다른 장르의 영화처럼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Style을 구축하기 위해 어떤 요소들을 끌어 와 사용하고 있는지, 이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그림 16].

 


어떤 영화는 미술관에서 미디어 아트 전시물을 감상하는 것에 더 가까운 관람 태도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제작 기술과 미술 음악 등 관련 예술 분야에 대한 지식과 감성,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이 느낀 것을 다시 언어로 분석하고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예술 영화를 관객이 외면하는 이유 중에는 관객이 예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영화의 감각을 개념으로 정의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명명되지 못한 감성과 경험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자신이 경험한 감성을 명명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은 그 경험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등장인물과 이야기 같은 언어로 표현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기억뿐이다.

 



영화 산업에서 해당 영화가 차지하는 위치나 영향력, 산업적 가치를 논하는 관객도 존재한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심리적 태도를 지닌 관객도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여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를 우호적으로 감상하는 태도를 지닌 관객도 존재한다.  그 외에도 영화 내용과 별개로 기술적 성취 여부를 평가하려 한다거나, 제작 뒷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영화를 읽는 방법 중 하나에 속한다.

MBC TV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는 가수다], 순위 제를 통해 누군가를 탈락시킨다는 시스템으로 인해 공연을 보다 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더구나 해당 가수가 노래를 하기 전에 인터뷰한 장면을 삽입하여, 개인적인 사정이라든가 인간적인 호소를 할 수 있도록 편집을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가수에게 보다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도 그런 배경이 존재한다. 영화를 찍은 직후 주연 배우가 자살을 했다든가. 남녀 배우가 사랑에 빠졌다든가 하는 뒷이야기들. 한국인이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주연을 맡은 영화라든가,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동네에서 촬영한 영화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관객과 전혀 다른 심리적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메시지에 주목하는 태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 '존재 가치'를 요구한다. 도덕적 교훈과 윤리적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즐기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영화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극장을 나오며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며 불만을 토해 내는 관객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것는 영화를 읽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다. 이때 이 가치라는 것은 영화가 지닌 목적, 지향하는 바,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오락물로서의 가치라든가 윤리성에 대한 질문은, '영화가 지향하는 바, 목적'이 무엇인가에 선행되지 않는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계속..

Posted by 늙은소

2012.04.29

하루하루 / 2012/04/29 05:46

1.
영화를 제외하고는 영상 미디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간혹 드라마 한 편 정도 챙겨보는 일이 고작. 교양 프로그램은 지루했고, 버라이어티는 무한도전을 제외하고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개그프로그램은 어느 지점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 역시 찾아보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한 10년 간 개그 프로그램을 본 일이 없는 것 같기도?) 음악도 제법 많이 들었고 음반도 꽤 가지고 있지만 음악 방송이나 공연 영상을 챙겨보지는 않았다. 공연을 직접 찾아가는 일도 썩 좋아하지 않는데 공연 영상을 볼 리가 있겠냐며.

TV를 바꾼 이후 제법 다양한 장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지조차 모르던 사람이 월드컵 축구를 새벽시간에 생방송으로 보질 않나, F1 그랑프리를 보기도 하는 등 이상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다가 뮤직비디오를 보기 시작하였고, 뮤직 비디오에서 다시 공연 영상으로. 공연 영상에서 뮤지컬을 찾아보는 등 장르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지난 주에는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를 두 편 보게 되었다. 내한공연을 한다며 한창 TV 광고를 할 때에 큰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영상으로 보며 충격(혹은 자극)을 받았다. 이런 종합예술이었을 줄이야. 영국 O2 Arena 공연 영상을 담은 Delirium과 캐나다 공연 영상을 담은 Corteo 두 편으로, 스타일이나 컨셉이 전혀 다른 작품이어서 좋은 비교가 되었다.

Delirium는 현대예술의 미디어 아트와 아프리카 원시미술이 결합한 것 같다면, Corteo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유머가 곁들여진 작품이었다. 두 작품을 보며 내내 기술에 예술을 결합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태양의 서커스]는 전 세계에 걸쳐 각기 다른 주제의 공연을 진행하는 몇 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가깝다. 각 팀은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체조선수라든가 가수, 발레리나 등 온갖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분류로는 예술가와 운동선수, 서커스 단원이 함께 공동작업을 한다는 건데 이런 경우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트 디렉터가 따고 있고 무대 연출이라든가 코스튬 디자이너가 별도로 존재하더라도 기술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분야의 종사자를 예술가가 컨트롤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작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인간문화재가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가 예술과 기술 모두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는 건 아니다. 보통 이런 경우 예술보다는 기술을 중심으로 인간문화재를 선정하게 된다. 식민지 시대를 오래 겪었던 탓에 복원과 기술의 유지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과거의 문화 예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더디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다. '장인'으로 내려오면 더욱 심각하다. 물론 예술적 재능이나 교육, 경험을 갖춘 사람들이 장인의 길을 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분야에서 '장인'은 예술과 무관한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성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닌데, 창의성이 부족하달까? 그들의 심미안은 과거에 머무르는 게 보통이고, 미적 평가의 범위 역시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기술은 있는데 예술적 능력이 아쉬운 작품들이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과거의 방식으로 과거의 작품들을 복원해내는 장인은 많지만 고유의 디자인 능력은 부족한 장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은세공이라든가 자수, 보자기, 나전칠기, 단청, 문살, 한과, 목공예 등등

[태양의 서커스]를 보면 안무가가 서커스 단원들과 협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중곡예사가 어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각각의 기술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 그리고 음악과는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해 곡예사가 단독으로 결정하게 두지 않고, 무대연출가와 안무가가 이를 통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이 가능하려면 예술가가 기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자는 예술가의 의견이나 통제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찌보면 쉽지만 어찌보면 어려운 작업.


2.
저녁 무렵. 갑자기 와플이 먹고 싶지 뭔가.
사먹는 건 왠지 돈 아까운 게 와플이라(범람하는 커피점마다 와플을 팔고 있는데 어찌나 비싼지.. 절대 안 사먹는다는) 이걸 만들어 먹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30분.
사무실을 나오며 이마트에 들러 와플팬을 찾아봤는데, 어. 없네? 왜 없지?
하는 수 없이 홈플러스까지 걸어가 와플팬과 와플믹스, 생크림을 사들고 사무실에 나와 와플을 만들기 시작했다.
(집은 인덕션이라 와플을 만들 수 없어서, 가스렌지가 있는 사무실로 나왔다는)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믹스 제품까지 나온 마당에 어려울 게 뭐 있다고 이걸 실패한다는 건지.
내가 원하던 것은 촉촉하고 조금 두께가 느껴지는 와플인데 만들어진 건 너무 바삭하고 심지어 팬에서 떨어지질 않아 위 아래가 분리되어 버리지 뭔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와플 믹스 포장지에 있는 '만드는 법'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촉촉하고 밀도가 느껴지는 와플이 되려면 조금 된 반죽이어야 하고, 위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잘 떨어지려면 팬에 기름을 둘러야 하며, 겉이 너무 타지 않도록 높지 않은 온도로 팬을 달구고, 와플팬 위 아래에 약간의 틈을 둬서 반죽이 너무 얇게 구워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굽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만든 반죽을 되게 하는 게 문제. 가루를 더 넣어야 하는데 가루가 없지 뭔가. 고민 하다가 부침가루를 넣어보기로 했다. 여기에 소금과 설탕을 조금 더 넣어 마늘스콘(혹은 야채 빵) 같은 맛이 되도록 반죽을 한 다음 와플을 구웠다. 하하하하~ 만족스러운 결과. (사진은 귀찮으니 생략)

막상 와플을 만들어보니, 역시 와플은 맛 보다 모양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팬을 열었을 때 블럭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와플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다. 어떤 사람은 와플팬으로 호빵도 굽고 누룽지도 만든다던데... 그 심리가 이해된달까. 아무거나 다 와플팬 사이에 넣고 눌러보고 싶은 유혹이..... ㅋㅋ


3.
와플팬과 기타등등을 사기 위해 홈플러스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내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내 뒤에 어떤 남자가 자신의 물건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남자. 과자와 음료수, 베이커리 등을 내려놓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과자들은 폭을 맞춰 2열로 수평을 맞춰 나란히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다른 과자를 쌓아올리더니, 음료 역시 높이와 폭을 맞춰 차곡차곡 쌓지 뭔가. 흘끔 장바구니 안을 보니 다른 제품들도 모두 크기를 맞춰 빈틈이 없도록 채워 넣은 게 보인다.

와~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아니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이다. 반갑다~ 뭐 이런 소리를 속으로 외쳐보았다.
물건을 올려놓고 계산을 마친 다음 다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기까지 오래 걸려봐야 1~2분인데, 그 잠깐을 위해 이토록 물건들을 정렬해가며 올려놓다니. 비뚤어진 것 하나 없이 빈 틈이 없도록 쌓아올려진 모습은, 최소 부피, 최소 표면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양복입은 이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픈 충동을 누르며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왔다.
'직각으로 놓여 있지 않은 물건을 보면 분명 바로잡아 주는 그런 사람 아니신가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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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