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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20040614-꿈의 기록

by 늙은소 2017. 9. 9.

이제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제목은 릴케의 산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거기에서 출발해 얼마 전 꾸었던 꿈에 대하여 기록해 본다.

 

01-a

서울 근교, 심리적 거리로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가는 길이다.

종종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 찾아가는 꿈을 꾸곤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름과 달리 지하철은 지상 위를 달린다.

 

좁고 가느다란 레일을 느리게 달리는 지하철이 조금 흔들린다. 앞으로 한번만 더 갈아타면 되는데 무심한 얼굴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3호선과 2호선의 오렌지색과 녹색이 수평으로 뻗어 있다. 잘못 선택된 길임을 깨닫고 급히 내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지하철을 탄다.

다시 내린다. 이제는 택시를 타야 한다.

너무 지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택시를 타고 좁은 숲길 같은 소읍을 지나 교도소 입구에 이른다. 이미 밤 9시가 되었다. 문 앞을 지키는 헌병에게 면회가 가능한지 물어 본다. 물론 그는 안 된다 말할 것이다.

 

02-a

그는 반투명한 아크릴판을 여러 장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자를 만들 수 있어요.

욕심을 내어 아크릴판을 여러 장 집어들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 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드는 자는 치수를 재는 것이 아닌 작도를 위한 자다.

 

각종 삼각자와 곡선자 같은 것들이 만들어 진다. 자는 모두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어렸을 때 삼각자 안의 구멍을 이용해 마치 총이라도 되는 양 집어 들고 아이들과 총 싸움을 하거나, 구멍에 둘째 손가락으로 넣어 자를 돌리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 웃음을 지어 보인다.

 

다시 모인 우리는 각자 만든 자를 꺼내 보인다. 내 자는 모두 모서리가 없다. 삼각형의 끝이 날카로운 예각의 모서리를 이루어야 하는데, 직각만 있을 뿐 예각은 모두 부러지고 없다. 아니다 부러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를 작게 만들지 않은 게 문제다. 당황한 나에게 처음 아크릴판을 나눠 준 사람이 자신의 자를 가져가라 말한다. 크기와 형태별로 하나씩 집어 들어 내 자리로 돌아온다. 자세히 보니 그 자는 조각들을 테이프로 붙여 만든 조잡한 것들뿐이었다. 왠지 내 손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불완전한 형태로 바뀌어 버리는 듯 하여 우울하다.

 

03-a

모니터 앞에 앉아 스크립트를 짜고 있었다. 검은 색 화면에 한 줄의 영문이 쓰여 있다. 철자가 틀렸다. 'gone' 'gong'으로 되어 있다. 고쳐야하는데 'gone'이 떠오르지 않는다.

 

01-b

교도소에 있던 사람은 2년 전에 헤어진 일 것이다. 요즘 부쩍 그 사람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온 것이 원인이다. 그와 함께 자하연 벤치에 앉아 이야기나누거나 순환도로를 따라 산책을 하곤 했는데, 학교에 돌아오니 그때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는 나를 만나기 얼마 전까지 감옥에 있었다. 정치 사범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되어 행정상의 기록은 지워진 상태였다. 연애를 하던 당시에 내게 보여 준 그의 이미지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라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때의 그라는 존재를 선뜻 구체화하기 어려웠다.

 

나는 과거의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별 것 아닌 일로 생각했을 뿐.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강인함이나 신념, 가치관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었다.

 

9시다. 어긋난 관계들을 위한 시간이다.

''를 꼭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나를 이끌었던 건 아니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음을 예감했을 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다. 몇 시까지 가야 하는지, 그 시각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계산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련함을 고집한다. 그를 만나는 것보다 늦더라도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집착이 더 나를 지배한다.

 

확인하는 것이 두렵다. 벌레로 가득 찼을 게 뻔한 쌀 보관함을 6개월 간 방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는 것이 두려워 방 하나를 폐쇄했다. 이해하기 힘든 어리석음이라며 질타를 받았다. 종종 나는 듣고 싶지 않은 것,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게 두려워 거금을 지불한다.

 

02-b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종착지가 보이고, 다양한 선택으로 여겨지던 길의 막다름을 확인하는 일이 늘어난다. 나는 자를 너무 크게 만들었다. 원형의 아크릴 판을 잘라 내어 만들 수 있는 삼각형의 크기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물론 작도를 위한 삼각자는 모서리가 부러져도 사용이 가능하다. 끊어진 선은 자를 이동해 이어 그리면 된다. 시간이 걸리고 조금은 번거로운 작업이 요구될 뿐.

 

내 모습이 이와 같다. 가끔은 나도 깔끔하게 떨어진 예각의 삼각자를 가지고 싶다. 마치 내년 성탄절에는 선물을 받아 보지 않을까 기대하는 아이처럼. 그러나 선물은 없었다. 앞으로도 삼각자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모서리 없는 큰 자를 머리를 굴려가며 쓸 것이냐, 이것을 잘라 작지만 제대로 된 삼각자를 만들 것이냐 선택의 문제다.

 

03-a

Gone.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나는 이미 떠났다.

'gone'이 떠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이미 떠나왔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떠나든 떠나지 못함이든 붙잡든 붙잡히든 그것은 나다. 그리고 그녀다.

 

그녀가 돌아왔다.

무엇이,

태양과 함께 떠난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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