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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2009년 12월 2일의 기록

by 늙은소 2018. 2. 15.

567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때마다 버스의 종점인 사당동까지 올 일이 없었던 불과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과천 서울대공원에 가기 위해 567번 버스를 타고 사당까지 온 다음 그곳에서 다시 4호선 전철을 탔던 기억.

우리는 대체로 망우동과 면목동에서 살았기에 567번 버스의 종점인 사당동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7호선 개통을 위한 공사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면목동에서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세종대와 화양리를 통과해 한강을 건너는 567번 노선은 인내의 터널을 통과하듯 지루했다. 입학과 함께 이 버스를 거의 매일 타게 되면서 차창 밖 풍경은 모두 외울 정도가 되었다. 이제 버스 안은 모자란 잠을 자는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버스가 노선이 아닌 곳을 달린다. 1년 간 거주한 적이 있는 80년대의 월계동을 지나, 월계동으로 이사 가기 두 해 전에 살았던 이문동 주변 도로가 나타났다. 그곳을 벗어나자 90년대의 시조사와 청량리를 지나간다. 어린 시절을 보낸 몇몇 장소를 시간을 건너뛰며 버스는 달린다. 버스 안에서 잠들었던 나는 몇 번씩 깨어나 그 풍경을 바라보며 어쨌든 이 버스는 사당까지 갈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치게 안심한 탓일까. 종점인 사당에서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사실 내릴 수 있었다. 문이 막 닫히려는 찰나 눈을 떴기에 문 쪽으로 달려가 기사님에게 여기서 내린다고 소리를 치면 비록 싫은 소리를 몇 마디 들을지언정 내리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귀찮음과 기사로부터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종점에서 내리지 못한다. 그제서야 늘 내리던 정거장이 종점이 아니었음을 기억해낸다. 승객이 내리는 정류장으로서의 마지막 하차지점 이후에도 버스는 조금 더 달려 차고지로 들어간다. 사당동 사거리를 통과한 후 언덕길을 달린 버스는 급히 우회전을 하여 차고지로 들어섰다. 버스기사는 앞문과 뒷문을 모두 열어 놓은 채 남아 있는 승객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며 내려 버렸고, 나는 텅 빈 버스 안에서 천천히 가지고 온 짐을 챙겼다.

 

 

이삿짐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 오늘부터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기로 했지.'

자취할 방조차 알아보지 않고 덜컥 짐부터 싸 들고 나왔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하며, 이 짐을 들고 학교까지 걸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귀찮은 마음이다. 사당동과 신림동은 생각보다 가까워 중간에 있어야 할 낙성대와 봉천동이 모두 사라진다. 꿈속의 공간은 이런 식으로 재편된다.

 

사당역 주변 자취촌 주인 아주머니들이 호객 행위 하듯 나를 부른다. 그 모양이 윤락가를 연상시킨다. 그녀들은 자신의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대문에 서서 '우리 집에 방 있어~ 한 달에 00만원만 내~'라며 지나가는 내게 소리를 친다그 목소리는 의지로 움직이기보다 습관에 가까워 별 효과를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는 애초에 신림9동에 자취방을 얻기로 계획하지 않았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기이한 자취집이 즐비하다. 육면체 블럭처럼 생긴 건물의 모서리에 4개의 기둥이 높이 솟아 있고 기둥들 끝에 두꺼운 천으로 만든 천막이 걸려 있다. 아래층 블록은 주인집, 위쪽 텐트가 자취방인 구조다. 저렇게 흔들려서야 원 불안하지 않나?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닮았다. 코끼리 등 위로 높이 솟아오른 천막. 아니지. 달리의 그림에서는 코끼리 다리가 기린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텐트는 위태로웠고, 거리의 자취방들은 수평을 이루지 못해 공중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봉천동 근처를 걷고 있을 때 하늘이 회색으로 변한다. 올려다보니 얼룩진 먹구름이 이미 내려앉은 후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태세인데 신림동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방을 계약해 놓지도 않고 이삿짐부터 가지고 온 내 결정에 '행운'을 선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날씨는 더욱 악화된다. 짐이 비에 젖을 것이 두려워 목적지에 가지도 못한 채 이 근처에서 덜컥 방을 계약해 버리면, 학교를 오갈 때마다 오늘을 떠올리며 자책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 때 난 왜 그랬지? 방을 왜 미리 알아보지 않았던 거야?'

매번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학교와 자취방을 오가게 될 것이다.

 

마침 그 때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지 제법 오래 된, 그리 유명하지 못한 중견 탤런트 출신 여배우가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흔하지 않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며, 죽은 남편이 자신을 위해 지어 준 집이니 살기 나쁘지 않을 거라며 자신의 집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자신의 최근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정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내 가방을 받아 들고 1층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오르는데 집 안 풍경은 바깥과 달리 음산했다. 나무를 작은 조각을 내어 붙인 마루는 여러 번 칠을 해 어두운 나뭇결을 드러냈고, 오징어채처럼 생긴 갈색 조각들이 마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게 영 마음에 걸려 살펴 보니 하나하나 꿈틀대며 움직인다. 그 모양이 신경 쓰여 도저히 이 집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내 짐을 챙겨 든 여자는 2층 계단을 오르고. 아주머니는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들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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