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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180823

by 늙은소 2018. 8. 23.

일년에 한 번 강의차 다녀오는 지방 도시가 있다. 거의 10년 정도 된 듯 하다.

한 때 강의가 많을 때는 일 년에 10번 정도 되었는데, 새로운 곳은 늘지 않고 남은 곳은 점점 줄어 이제 여기가 유일하다. 어쩌면 올해가 끝이 아닐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보통 강의 일정상 내 차례는 겨울일 때가 많았는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강의가 여름으로 잡혔다.


더위 때문인지 3시간 강의를 한 탓인지..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중에 탈진을 해서 결국 기차를 타지 못하고 말았다.

작년 겨울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그 때는 중간에 병원에 들러 링겔을 맞고 몇 시간 누워 있다가 겨우 저녁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전전 해에는 광명역까지는 올라왔으나 거기서 탈진을 하여 차를 탈 수 없게 되어 광명역에서 후배를 부른 일이 있었고 3년 전에는 광명역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가 결국 중간에 내려서 몇 번씩 토하고 2시간 가량 거리에서 쉰 다음 집에 오기도 했다. 그 전에는 동대구역까지 가질 못해서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역까지 걸어갔다거나, 더 중간 지점에서 내려서 약국에 들러 약을 먹고 약국 의자에 널부러져 있던 일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깔끔하게 일정을 소화한 날이 거의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대구역으로 가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지하철에서 무작정 내려야 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일단 내려서 지상으로 나왔는데 신기한 건 작년 겨울에 비슷한 이유로 내렸던 바로 그 역에서 내가 또 내렸다는 점이었다. (그 때는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서 시야가 제대로 안 보이는 상태에서 내렸기 때문에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린 지도 몰랐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때 마침 4거리에 큰 약국이 있었고, 그 건물 위에 제법 규모가 큰 내과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들어 좌우로 두리번거리니 그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 외벽에는 저녁 9시까지 운영한다는 문구가 창문에 커다랗게 써 있었다.

안심을 하고 병원을 찾아갔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한 달에 한 번 오전만 운영하는 날이지 뭔가.

당연히 건물 1층 약국도 문을 닫았고, 그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너무 덥고 계속 토한 상태라 탈진과 탈수 증세가 심한데 다른 병원은 못찾겠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역까지 겨우 올 수 있었다. 동대구역에 뭐가 있겠지. 의무실 같은 거라든가... 그 바로 옆이 신세계백화점이던데 그 위에 호텔 같은 건 없으려나? 주변에 큰 병원 하나 쯤은 있을 거야. 아니면 적어도 급 낮은 호텔 몇 개 정도라도 제발 있기를..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을 워낙 많이 겪어서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약이나 병원 보다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수분을 보충하고 누워서 잠시 쉬는 일이었다. 최소한 두 시간에서 4시간 정도. 딱 그 정도만 누워서 안정을 취하면 기차를 타고 집까지 올 체력을 비축할 수 있는데 그걸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찜질방같은 거라도 있으면 일단 들어갈텐데.. 하지만 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멀미가 너무 심해서 택시를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동대구역에 겨우 도착하여 물어보니 의무실이나 병원같은 건 역사 내부에 전혀 없다고 한다. 약국과 안내소에 찾아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 답변이었다. 내 꼴이 보통이 아니었을텐데도 도와주려는 생각을 내비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역을 이용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비상시 사람 하나 누워서 쉴 장소가 없다니. 하다못해 주변에 병원도 없고 호텔도 없다고 하고. 있는 건 모텔들 뿐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역에서 나와 한 시간 가까이 돌아다닌 끝에 겨우 숙소를 찾아냈고, 체크인을 한 후 화장실에서 몇 번을 토하고 샤워후 물을 마신 다음 잠을 잘 수 있었다. 몇 번씩 깨서 다시 물을 마시고 잠들고를 반복한 끝에 체력을 회복하여 아침 6시 첫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상 해보니 병원에서 링겔 맞는 거나 광명역에 겨우 도착해서 몇 시간씩 역사 안에서 토하고 쉬고 반복하는 것 보다는 아예 해당 지역에서 숙소를 잡고 하루 자고 다음 날 올라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링겔+병원진료+약값이나 숙소 비용이나 별 차이도 안나고. 문제가 있다면 왠지 내년에는 강의가 안 들어올 것 같다는 느낌? 


몸이 늘 이런 식이다보니 지방 출장이나 강의차 지방에 가게 되어도 관광 한 번을 하지 못하였었다.

제주도 강의가 들어왔을 때에도 겸사겸사 하루 정도 관광을 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걸 못하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었다. 부산으로 강의를 갔을 때에도 숙소가 해운대 바로 옆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에서 쓰러져 있느라 바닷가 한 번을 걷지 못하였다.

이 놈의 저질 체력과 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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