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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8

5개의 오이와 오피스텔 11층 오이를 사러 나가던 길에 생각을 바꿔 나는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가을이 왔는가 싶더니 다시 더위가 찾아온 9월 초. 잠을 엉망으로 잔 탓에 온 몸이 개운하지 못하고 머리까지 무거운 하루였다. 침대에 누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들 사이를 헤짚어가며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머리에 난 구멍을 찾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마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댄 탓에 어느 사이엔가 구멍은 500원 동전 만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 구멍을 향해 눈을 가져가면 소리를 빨아들이는 암흑이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가려 보이지 않게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며 거울을 볼 때마다 은근한 근심을 내쉬어 본다. 이제는 그냥 두어도 새로운 머리카락이 이 곳에서 자라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어이 손가락은 이제는 거뭇해져버리기까지 .. 2017. 9. 23.
20141001 - 재능기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는 현재 중학교 1학년으로 남자아이다. 보육원에 온 것은 얼마되지 않으며,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에 의한 가정 폭력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꽤 심각한 수준이어서 현재도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중이다) 몇 달 동안 수업을 하며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영민한 편이고 또 한 때 공부를 잘했다며 그런 자신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현재로서는 공부를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이 없으며, 보육원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보육원에 와서 적응하기까지 걸린 2년 동안 학교에서의 수업을 거의 듣지 않은 듯 했고 5~6학년 과정이 그대로 누락이 된 듯 하다. 이 아이를 가르친지 벌써 5개월이 넘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 2017. 9. 15.
[나를 찾아줘] : 사라진 그녀가 찾은 것 * 이 글에는 영화 [나를 찾아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무척이나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로자먼드 파이크, 벤 애플렉 니체는 [잠언과 간주곡]에서 이야기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러한 생각으로 사람들은 수 많은 괴로운 밤을 참고 견딜 수 있다' ... 늦은 오후, 잠시 빠져든 낮잠 속에서 나는 사람의 목을 베었다. 작고 날렵한 면도용 칼을 손에 쥔 채 덤벼들 듯 다가오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나갔다. 그곳에는 테니스의 서브를 넣는 동작과 같은. 가뿐하면서도 힘에 넘친 리듬이 있었다. 칼을 손에 쥔 팔이 사선을 그으며 아래로 곡선을 그을 때. 사람들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칼날이 세포를 파괴하며 피부조직을 .. 2017. 9. 9.
장르를 소비하는 방법 01. 세상에는 자기만의 신파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약점. 조금만 건드리면 툭 하고 와락 울어버리는 지점을 몸 어딘가에 각인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리 잘 만든 영화여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는 시큰둥한데 작정하고 울리려 만든 삼류 가족극에 펑펑 울게 되는 그런 단추가 내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어떤 사람은 동물농장 속 버려진 강아지가 스위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엇갈린 채 헤어진 첫사랑이 스위치가 되기도 한다. 신파의 단추가 제각각인 것처럼, 신파를 만났을 때의 대처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부정하거나 항복하거나. 보이고 싶지 않은 약점을 들켰다며 발끈해 성을 내기 보다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낼 줄 아는 사람이 편하다. .. 2017. 9. 9.
20040614-꿈의 기록 이제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제목은 릴케의 산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거기에서 출발해 얼마 전 꾸었던 꿈에 대하여 기록해 본다. 01-a 서울 근교, 심리적 거리로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가는 길이다. 종종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 찾아가는 꿈을 꾸곤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름과 달리 지하철은 지상 위를 달린다. 좁고 가느다란 레일을 느리게 달리는 지하철이 조금 흔들린다. 앞으로 한번만 더 갈아타면 되는데 무심한 얼굴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3호선과 2호선의 오렌지색과 녹색이 수평으로 뻗어 있다. 잘못 선택된 길임을 깨닫고 급히 내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지하철을 탄다. 다시 내린다. 이제는 택시를 타야 한다. 너무 지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택시를 .. 2017. 9. 9.
20031023-꿈의 기록 용산 전자상가에 가는 방법은 이미 여러 경로를 알고 있었다. 1호선 용산역에서 내려 역사 내부와 전자상가를 이어주는 공중다리를 따라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4호선 신용산역을 이용한 다음 이곳에서 선인상가까지 연결된 지하통로를 지나는 방법도 있다. 망우동을 떠나온 이후, 한강 이남의 여러 곳을 일년 주기로 이사하며 일 년에 몇 번씩 컴퓨터 부품이나 소모품들을 사기 위해 용산을 방문하곤 했다. 망우동에서 살 때에는 1호선을 이용해 용산 전자상가를 방문하곤 했는데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는 줄곧 4호선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제법 큰 돈을 들여 컴퓨터를 조립한 이후 직접 부품을 구매하는 일도 뜸해졌고, 소모품들은 인터넷으로 구매하거나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구매하는 일이 잦아졌다.. 2017. 9. 1.
터미네이터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 - 2009년 5월 17일 * 주의 : 이 글에는 태권브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터미네이터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 어린 시절 나는 ‘600만 불 사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소머즈는 예뻐서 좋았고 맥가이버는 똑똑해서 좋았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하늘을 가리키며 에어울프가 지나간다고 소리쳤고 오디오 이퀄라이저를 보면 ‘전격제트작전’의 키트가 떠올라 남몰래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주말마다 그들은 미국을 지키고 더 나아가 세계를 지켰다. 세계를 파괴하는 무기는 왜 그리 많으며, 또 왜 그리 손쉽게 악당들의 손에 넘어가는지. TV속 영웅들은 왜 꼭 1초를 남겨놓고 폭탄을 제거해 사람 간을 들었다 내려놓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떠랴 재미있는 것을. 어느 날 슬슬 화가 나기.. 2017. 9. 1.
그는 변기뚜껑을 왜 닫은 것일까 - 2009년 2월 4일 그는 변기뚜껑을 왜 닫은 것일까 며칠 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음식쓰레기 버리는 일로 한 소리 듣고 말았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음식쓰레기를 큰 맘 먹고 버렸다는 말을 하니 그 후배가 어찌나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지... 선배가 말로만 듣던 그런 인간인 줄은 몰랐다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쓰레기를 얼리는 칸에는 음식을 넣어두지 않는다고 항변해봤지만 나빠진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썩기 전에 얼려놓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지 않느냐 설득해봤으나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하긴 구차한 변명인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통할 리 없지. 사실 나는 음식쓰레기 버리는 것에 상당한 공포심을 느낀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타.. 2017.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