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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책의 수직선과 수평선

by 늙은소 2004. 6. 14.
활자중독이 아니냐는 말도 듣기도 하였으나, 실상 나는 상당히 '난독亂讀'에 속한다. 손에 잡히는 책을 읽다가는 내팽게친 뒤 다른 책을 읽는 식이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고 또 읽어 외우기까지 하는 사람에 비한다면 나의 책읽기는 소모적이고, 생산적이지 못하여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정보를 기록하는 매체로서의 책은 상당히 뒤늦게 발명되었다. 얇고, 가볍고, 기록하기 편하고, 미세한 기록이 가능하며 수정이 가능한 '종이의 발명'이 없었다면 책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종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정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 좁은 공간을 활용해 기록되었으며, 그 안에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아이콘(도상)과 다이어그램(도표)를 필요로 했다. 
그로 인해 정보는 서술적인 내용 보다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이해가능한 정보로 채워졌고, 해석학이나 도상학이 매우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종이가 등장하고, 책이 등장하며.. 많은 양의 정보를 기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각종 설명과 도표, 해석과 필자의 주석과 같은 부가정보가 함께 기록되었다. 공간의 제약이 사라지자, 독자가 오해하거나 다르게 이해할만한 모든 부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책 한 권에 들어가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서, 그저 정보를 나열하지않고 이것들에 체계를 부여하는 규칙이 개발되었다.
1
1-1
1-2
2
2-1
2-1-1
2-1-2
2-2
이 방식을 '트리구조'라 부른다. (종속과목강문계..와 같은 생명계통도에서부터 웹사이트에 이르기까지 트리구조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트리구조의 약점은 '1-2'과 '2-1-2'만 놓고 본다면,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다. 줄기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전체 핵심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정보가 방대하다는 것..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목차나 인덱스, 서문 등이 추가되었다.
...

정보화기술은 전혀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기억장치의 발달로 방대한 정보를 모두 외울 필요는 없게 되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억장치가 기록하고 있는 정보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A도시의 중앙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외우기보다는 '왜 A도시와 B도시 모두 중앙에 광장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추리해내야 한다.

정보를 단순하게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정보들 간의 관계에 주목해야한다.
내가 책을 읽는 방식 역시 이와 같다. 책에 기록된 정보를 복사하듯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대략의 내용을 이해하여 그 정보들 사이의 연결선을 그으며 파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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