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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무협을 SF장르로 넣어본들 어떠리

by 늙은소 2010. 6. 26.

* 첨부한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

1.
무협을 SF 장르에 넣어볼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
[프렌즈]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레이첼은 치과의사 부인이며, 로스는 레즈비언임을 자각하지 못한 아내와 결혼생활을 유지 중이다. 조이는 잘 나가는 TV스타며, 모니카는 뚱뚱한 요리사로 남자경험이 전무하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 ‘3으로 돌아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지금쯤 다르게 살고 있을 텐데와 다르지 않다. 혹은 어머니의 넋두리. ‘너희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의 또 다른 버전?

 

이런 상상을 영화는 즐긴다. 예를 들면, [패밀리 맨][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

소재가 아닌 배경이 되는 경우로 [왓치맨]을 떠올리는 것도 좋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3선 재선에 성공하여 80년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미국을 지배하는 풍경이라니!

 

이런 장르를 Alternate history(대체역사)라 한다. 대체역사는 SF의 하위장르로 우리가 아는 역사와 다른, 변경된 세계관을 배경 또는 주제로 삼는다. ‘그때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과 같은 질문이 거대한 울림으로 자리하는 게 이 장르의 특징이다. 때문에 Alternate history는 펑크(Cyberpunk, Steampunk )와도 관련을 맺는다. 특정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펑크는 인공지능을 대상으로 할 때 사이버펑크를, 유전공학이 대상이 되면 바이오펑크, 증기기관을 대상으로 삼으면 스팀펑크로 다시 세분화된다. 여기서 다시. 펑크의 장르 세분화를 슈퍼 히어로 장르와 비교해본다면? 슈퍼 히어로는 특정 기능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킨 인간형이 아니었던가.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완벽한 성공을 거두어 인간복제가 보편화된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듯, 파괴된 세포를 재생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인간을 상상하는 일. 어딘가 닮았다.

 

그래서 요즘, 무협을 SF장르에 포지셔닝 해보고 싶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재가 되었다)

특히 장예모 감독의 영화([영웅], [연인], [황후화]) [야연](펑 사요강)을 한데 묶어, 장르화를 추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황후화], 장예모



이 네 편의 영화에서 배경이 된 중국의 과거는 Alternate history에 가깝다. 대 제국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지나친 허세를 부린다며 거센 비판을 들어야 했으나, 이를 달리 해석하면 허세과장이며 지나침극단이 아닌가극단적 과장법을 통해 제국의 성공적 지배와 그 결과물을 상상해보는 것. [영웅] [황후화], [야연]은 바로 그 결과물에 집착한다. 영화는 대 제국을 세우는 과정이 아니라, 권력 지배가 완료된 뒤의 풍경을 소비한다. 높은 계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궁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수 많은 궁인들을 무대 배경으로 삼으며 영화는 전개된다. 분명 중국은 몇 번이나 통일되었고 대 제국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양한 민족과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을 통제하는 권력을 지향하진 않았다. 통제를 하기에는 대륙이 지나치게 넓었으며, 언어와 민족이 너무 다양했기 때문이다. 무난한 합의와 방임이 차라리 더 수월했기에그래서 영화는 만약 중국이 거대한 대륙과 막대한 인구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하나의 권력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더라면 어떠한 힘이 생성될 수 있는지, 이것을 상상하고자 한다. ‘과거에 그랬다가 아니라 과거에 그랬더라면이라는 상상.


 
2.

또 하나 떠오른 생각 중 하나. 
무술의 고수슈퍼히어로와 비교해보는 일은 어떨까.

이들은 모두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무술의 고수가 스스로를 연마하여 고수의 길에 이른다면, 슈퍼 히어로는 운명처럼 능력을 획득한다. 전자는 능동적인데 반해 후자는 수동적이다. 하지만 그 수동성 때문에 슈퍼 히어로 장르는 운명이 영웅을 선택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또한 무협에서는 기술에 대한 접근이 개방되어 있으며 타인에게 이전하거나 학습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반면 슈퍼 히어로의 능력은 철저히 개인에게 종속된다. 이런 차이를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무협을 슈퍼 히어로가 아닌, 사이버펑크 장르와 비교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인공지능 기술이 완성되어 AI가 등장하듯, 무술이 완성을 이루어 개인이 시간성과 역사성을 초월한 절정의 고수가 되는 설정. '기술의 극단적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무협을 바라본다면 어떻겠는가. [쿵푸 팬더]에서 대 사부인 우그웨이는 미래를 예견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으로 묘사된다. 상당수의 무협은 무술의 완성을 육체적 기술과 정신 능력의 결합으로 다루며, 그 때문에 고수들은 세계를 통찰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능력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무술의 고수는 [메트릭스]의 네오처럼 'the One'이라는 개념에 닿아 있다. 그러니 '무협펑크'라는 장르가 생성되지 말란 법도 없을 듯.

 


3.
서구의 비극을 동양에서 차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영웅], 장예모


장예모의 [영웅], [연인], [황후화]와 펑 샤오강의 [야연]은 서구적 비극장르에 충실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거대한 권력이라는 무대 위에서, 인물들은 권력에의 전복을 꾀하다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의 지음知音과도 같은 관계가 드러난다. [황후화]에서 황제(주윤발)는 세 아들 중 누구보다 자신을 닮았으며 능력이 출중한 둘째 아들 원걸을 죽게 하는데, 바로 그 죽음의 선택이 원걸이 뛰어난 왕재임을 증명하는 길이 되고 만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한 아들을 얻을 것인가' 혹은 '명예롭게 죽음을 택한 아들을 잃을 것인가'. 황제의 마지막 제안은 그 자신에게도 함정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세 명의 아들을 모두 잃고 황제는 홀로 궁에서 식사를 한다. [영웅]역시 마찬가지로, 진시황은 그를 암살하려 찾아온 무명(이연걸)이 신하들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뜻을 간파하고 있음에 감동한다. 그러나 그는 무명의 처형을 명한 뒤 홀로 궁에서 애석한 슬픔에 잠긴다.


장예모는 왜 이러한 영화들을 반복하는 것일까
 

제국은 현존하나 전복은 실패하고 미래는 단절된다. 그러나 제국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과 군사, 궁인들 뿐이다. 그들 속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집단을 수평과 수직 구도로 보여줄 뿐 개인의 얼굴을 포착하지 않는다. 무대 장치화 되어버린 인물들. 사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대 위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무술 실력을 겨루고,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죽음의 향연은 계속된다.

왕은 현존하나 그의 미래는 왕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시간성이 소멸된 채 과거의 한 지점에서 멈춰버린 거대한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