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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네버 렛 미 고] : 공공재산으로서의 복제인간

by 늙은소 2011. 4. 12.








네버 렛 미 고(Never Let Me Go), 2010

감독 : 마크 로마넥
출연 : 캐리 멀리건, 앤드류 가필드, 키이라 나이틀리


* 사용된 이미지는 영화리뷰를 위한 것으로,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인류는 불치병에 대한 해결방안을 마련한다. 장기기증용 복제인간을 활용하는 것. 이로 인해 인류의 평균수명은 100세를 넘어서게 된다.

1978년 영국 헤일셤. 기숙학교처럼 보이는 이 곳은 복제인간들을 적당한 연령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기관이다.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류 가필드), 루스(키이라 나이틀리)는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후 커티지라는 숙소로 이동하여 이후의 삶을 계속하다 결국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흩어진다. 몇 번의 장기기증으로 죽음에 가까워진 루스와 역시 반복된 기증으로 생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토미. 기증자를 돕는 케어러가 되어, 기증자 목록에 오르는 것을 몇 년 간 연기할 수 있었던 캐시. 이들은 10년 만에 다시 만나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복제인간들도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오래된 소문을 확인하려 한다.

복제인간들은 장기기증을 연장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소망하지만, 이를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교육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속 장기들을 관리함으로써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받아들이는 순응적 태도. 생존본능을 압도할 만큼의 과도한 세뇌교육이 행해진 것일까? 영화에서 보여지는 헤일셤의 교육은 다소 억압적인 면은 있으나, 그것은 보통의 기숙학교와 집단을 다루는 여타 기관들이 택하는 전략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네버 렛 미 고]에서의 복제인간들이 [블레이드 러너]처럼 주인들을 살해하면서까지 급진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는 것. 혹은 [아일랜드]처럼 진실을 맞딱트려 그 부당함에 절망하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성인이 된 후 커티지로 옮겨온 후에도 복제인간들은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 좋은 재료는 아니지만 국가는 이들에게 식품을 제공하였으며, 숙소와 제법 자유로운 활동을 허가해왔다. 이들은 필요 이상 교육될 필요도, 경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필요 없이 미래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빈부격차, 계급간 격차가 심화되고 그것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하층민의 자녀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노력해서 공부를 한다 한들 상류층이 다니는 학교에 진학할 리 없고,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 노동자로 살거나 그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 자명한 사회. 자신의 미래를, 그 한계를 너무 일찍 확인한 아이들처럼 복제인간들은 제도를 향해 분노하지 않는 존재로 성장한다.



[네버 렛 미 고]의 복제인간은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재산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칸은 기업의 제품이었고, [아일랜드]의 복제인간은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개인자산이다. [아일랜드]의 복제인간은 원본의 우수한 유전자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기기증용 제품으로 사용 후 폐기하기에는 아깝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판단을 하게 만든다. 원본 입장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가 사회적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 불리하겠으나, 사회적으로는 우수한 복제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대신 얻게 될 이익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세계관에서 탈출한 복제인간은, 우수한 유전자를 활용해 자신이 인간임을 입증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사회는 인간이네 아니네 토론하느라 시간낭비할 필요 없이 적절히 타협함으로써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면 될 일이다. 

또 다른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은 상품이며, 사용가치가 입증된 제품이라는 점에서 자기증명의 기회를 얻는다.
영화는 '복제인간은 꿈을 꾸는가', '복제인간도 영혼이 있는가'를 질문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와 [아일랜드], [네버 렛 미 고]의 복제인간들의 경제적 효용성, 사회적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가로 '인간이 될 기회'에 차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건 더 이상 영혼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상상해보자. 만약 [아일랜드]와 [블레이드 러너], [네버 렛 미 고] 이 세가지 복제인간이 모두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를. 부유층은 자신의 사적인 목적으로 복제인간을 만들고, 기업은 기업의 이윤을 위한 제품으로, 그리고 국가는 장기기증용 공공재산으로 복제인간을 만들어왔다면. '인간'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이 세 부류의 복제인간들은 서로 연대하게 될까?


[네버 렛 미 고]의 복제인간은 공공재산이다. 우수한 유전자가 아닌 오히려 그 반대의 위치에 선 존재들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원본이, 유전자를 팔아야만 했던 하층민(범죄자나 창녀, 포르노 잡지 모델, 약물중독자 등)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로인해 자신의 원본을 찾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열등한 존재임을 재확인할 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몸 속의 장기를 보관하는 그릇일 뿐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만약 나에게 다른 인간과 동일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보다 나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남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만약 국가가 복제인간을 공공재산으로 분류하고 이를 활용하고자 할 때, 어떤 유전자를 택하여 복제할 것인가에 대한 선별기준을 가늠하게 한다. 말썽을 일으킬만한 요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국가는 인간 사회에서 도태될 만한 개체를 선택하여 복제를 하려 들 것이다. 여타의 재능이 없으며, 머리가 좋지도 외모가 훌륭하지도 않은. 사회에 순응하며 희망이나 욕심이 없는 그런 인물을 택하려 들지 않겠나. '죽기엔 아깝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그래서 이 영화는 인간인가 아닌가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증명의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그리고 사회는,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평등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영화는 과거며, 오지 않은 미래다. 거기서 현재가 보인다.  꽤 슬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