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거리 위의 상자들

by 늙은소 2012. 3. 30.

01.

거리 곳곳에 상자들이 놓여 있다. 비상시 사용할 물품을 보관하는 소형 창고라든가 관련 종사자가 아니라면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 시설물들이. 어떤 상자가 어떤 시설물을 보호하는 것인지 이를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그나마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상자는 제설용 염화칼슘과 폭우가 내렸을 때 빗물이 지하도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모래 주머니 보관함 정도. 이런 상자들은 다른 시설에 비해 크기가 작고 문을 여는 것도 비교적 쉬운 편이며, 내용물이 무엇인지 일반인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공무원이나 경찰이 아니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일반 시민들이 그 안의 물품을 사용해 긴급 활동을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닐까 해석하게 할 만큼 상자의 정체성은 분명하였고, 보안은 허술했다.

 

거리에는 높이가 어른의 어깨 정도이며 폭은 두 팔을 벌린 것보다 넓은. 한 눈에 보기에도 두껍고 강한 금속성 재질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그런 상자도 놓여 있었다. 비전문가가 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표면에 있어 길 가는 사람 누구도 그것을 유심히 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상자의 문을 여는 방식이 생각보다 단순한 형태여서 마음만 먹는다면 그 문을 여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 이런 상자가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닐 터. 똑같은 기능의, 똑같은 모양의 상자들을 여는 열쇠는 하나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시설 관리자가 각각의 상자를 열기 위해 수십 개의 열쇠를 가지고 다니며, 열어야 할 상자의 번호와 열쇠를 대조해 가며 문을 여닫지는 않을 게 아닌가. 위험 표시와 어려운 기호, 각종 경고 문구만이 시설을 보호하는 유일한 책임자로 여겨 질 정도로 열쇠는 단순해 보였다.

 

02.

시청과 시의회, 구청, 법원 등 시의 온갖 시설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근방의 거리에 상자들은 20~30m 간격을 두고 하나씩 놓여 있었다. 보통은 인적이 드문 보도, 건물 벽 가까운 곳에 상자가 위치했고 사람들은 상자를 피해 차도 방향으로 지나다녔다. 어떤 상자는 벽과 너무 가까워 그 사이로 사람이 지나기 힘들 정도인 경우도 있었다. 비가 온 후 도로가 거의 마를 때에도 상자 주변은 마르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빗물이 고여 있곤 했다. 길을 지나다 그 틈 사이를 슬쩍 쳐다보면 미끄러워 보이는 녹색의 물이끼를 발견한다거나, 어디서 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모래흙이 아스팔트를 덮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름이었다.

시의회 주차장 바깥 벽에 위치한 상자를 지나가려는데, 벽과 상자 사이에 이상한 것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벽 안쪽에 심어 놓은 나무가 가지를 뻗으며 인도 방향으로 자란 탓에 상자는 일년 내내 그늘져 있었고 다른 곳에 비해서도 특히 사람이 다니는 일이 거의 없는 도로여서 그 틈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종종 있던 터라 처음에는 그저 그것이 쓰레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쓰레기라 보기에는 그 높이가 이상했다.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바닥에 있질 않고 1미터 가량 높이에 푸른색 보따리 같은 게 껴 있지 뭔가. 걸음이 계속되자 그것의 형체가 분명해졌다. 짙은 푸른색 가방을 짊어진 소년이 상자와 벽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소년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가라며 소리쳤다. 저 아이는 왜 그곳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03.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던 건널목에서 맞은편을 보며, 소년은 생각한다.

 

거리가 제법 먼 편이라 맞은편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움에도 양 팔 겨드랑이에 철재 목발을 끼운 채 서 있는 사람이 소년의 눈에 들어온다. 신호가 바뀌고, 그는 목발이 익숙하지 않은 듯 다소 불편한 모습으로 건널목을 건너왔다. 소년은 길을 건너며 그 사람을 보았고, 생각했다. 저 사람을 넘어트리는 것은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무게 중심을 잃고 쓰러지게 만들 약점 몇 곳이 너무나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니 오히려 그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길을 반 이상 건너던 소년은 뒤를 돌아 왔던 방향으로 걸으며 그 남자를 뒤 따라간다. 소년은 그를 계속 관찰한다. 다리를 다친 지 얼마나 된 것일까. 목발을 두 개 사용하는 사람과 하나를 사용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무겁고 강한 금속처럼 보이지만 목발이 지나치게 무겁다면 환자들이 오히려 불편할 테니 실제로는 나무보다 더 가벼운 재질이리라 짐작해 보기도 한다. 목발이 익숙하지 않은 남자는 목발로 땅을 딛을 때와, 발로 딛어야 할 때의 박자를 놓치기 일쑤여서 그 때마다 소년도 걸음을 멈춰야 했다. 누가 본다면 영락없는 미행이라고 생각하겠어. 미행을 하면서도 미행이 아닌 척 걷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소년은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은 왜 범죄를 저지를까? 돈이 필요해서? 혹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목발 짚은 남자를 뒤따라 걸으며 소년은 생각한다.

 

그것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약점이, 그리고 빈 틈이 보이니까.

CCTV가 설치되어 있으며 보안 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XX 건물은 1층 편의점으로 들어가 건물 안쪽과 연결된 보조 출입문으로 나가면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학교 가는 길에 본 연립주택은 대형 쓰레기통 위에 올라가 벽을 타고 모서리를 지나가면 집과 집 사이의 틈을 양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두 집은 모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처럼 닮아 있는데, 심지어 외벽의 벽돌은 장식을 한답시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출 벽돌을 박아 넣어 벽을 타고 오르기 쉬워 보였다. 소년에게 이 모든 것은 도미노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04.

적당한 간격과 정해진 범위의 각도를 유지하며 도미노를 세우면, 도미노는 다른 도미노를 넘어트리며 쓰러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다시 또 다른 하나를. ‘도미노 전체가 모두 쓰러질 수 있도록 설계하되, 공간에 제한을 둘 것도미노는 일렬을 고집하지 않으며 계단이나 육교, 미끄럼틀과 같은 보조물을 사용해 다양한 형태로 구성하는 게 가능하다. 육교 아래를 지나가며 쓰러지던 도미노가 육교 위를 쓰러지며 지나가고. 미끄럼틀 계단을 오르며 쓰러지던 도미노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다른 도미노를 넘어트린다.

 

도미노는 모든 블럭이 동일한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도미노는 모두 넘어지기 위해 세워진다. 또한 넘어지면서 다른 무언가를 쓰러트려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쉽고 단순하다. 소년은 그것이 좋았다.

 

05.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 드라마를 보며 소년은 생각한다. 저렇게 복잡한 이유가 필요할까. 범죄자에게 범죄의 이유를 부여하는 것은 공포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이유가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 모든 사람의 행위에 이유가 있다는 전제는, 그 행위를 예방하거나 저지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우게 한다.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행위에는 예방할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

 

06.

사냥을 하는 동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고 윤리선생이 수업 시간에 말한 것이 떠오른다. 근대철학 단원이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2교시였던 어느 오전. 수업을 하다 말고 윤리는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필요한 음식을 위해 사냥하는 동물과, 지금 음식이 필요하지 않는데도 사냥하는 동물로 나뉜다며, 인간이 바로 후자라며 그는 말을 시작했다. 인간의 탐욕을 비판하기 위해 그는 이 말을 꺼냈을 터였다. 하지만 대동맥이 지나가는 목을 드러내 놓고 가녀린 네 다리로 유유히 걷는 어린 사슴을 사냥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호랑이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연습이 필요했을 수도. 치통을 앓고 있어 이빨이 빠지는 건 아닌가 염려하기 시작한 늙은 호랑이가 자신의 건재함을 스스로에게 입증할 필요가 있던 것인지도 모를 일.

 

07.

샛별아파트 3단지로 향하는 공원길로 남자가 들어섰다. 공원길은 아치 형을 이룬 구조물을 덩쿨이 타고 올라 어두웠다. 붉은색 가로등 빛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들어왔고, 내가 어지러운 것인지 길이 흔들리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여기서 50미터를 더 가면 놀이터가 나올텐데... 친구들과 놀이터 시소 옆 흙을 파 작은 함정을 만들어 놓고 여자애들이 거기에 빠지기를 기다리며 놀던 때를 떠올리느라 소년은 자신이 미행하던 사내를 잊고 만다. 잠시 딴 생각을 하며 두어 걸음 걷는 동안 남자는 사라졌다. 공원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며 소년은 계속 뒤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 자꾸만 신경 쓰인다.

 

 

사무실 앞, 사거리 건널목에서 파란 신호를 기다리며 한 상상들.

 

(2012-03-30. 기록)

 

'비선형적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극과 결합한 에로티시즘  (9) 2017.04.23
드라마 역적 : 신분 상승의 꿈  (2) 2017.03.13
Prime Number  (2) 2012.03.17
'얼음과 불의 노래'로 시작된 생각의 꼬리  (18) 2011.06.07
자기 기만의 패턴  (2) 201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