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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The Phantom of the Opera : 2004년과 2011년

by 늙은소 2012. 4. 17.

The Phantom of the Opera, 2011
(at the Royal Albert Hall)

감독 : 캐머런 맥킨토시, 로렌스 코너, 질리안 린
출연 : 시에라 보게스(크리스틴), 라민 카림루(팬텀), 하들리 프레이저(라울)








 

깊이 파고들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흔하고 오래된 소재인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걷어내면 괴물과 미녀, 그리고 미녀를 구하기 위해 괴물과 싸우는 청년이 남을 뿐입니다.

 

극단이니, 소프라노니 하는 장치들을 모두 제거하면 남겨지는 이야기 역시 간단합니다. 지하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괴물이 아름다운 공주를 납치한 후, 미로 속에 그녀를 가두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영웅은 미로에 들어가고 괴물을 무찌른 후 무사히 공주와 미로를 빠져나오죠. 익숙합니다. 이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요? 용과 싸우는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죠. 그리스 신화는 어떨까요? 미궁(Labyrinthos)에 갇혀 있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와 테세우스(Theseus)의 싸움이 여기 해당됩니다. 또 있군요.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와, 하데스로부터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하세계에 내려간 오르페우스도 이 카테고리에 묶는 게 가능합니다. (물론 이들 중 몇몇은 임무를 실패하기도 합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이 구도를 사용하되, 영웅이 아닌 괴물의 입장에 선 작품입니다.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는 왜 제물을 필요로 했을까? 미녀를 제물로 요구하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선이 바뀝니다. 공주를 납치하는 용의 입장에 선 작품인 거죠. 참신하고 새롭다고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나이든 남성의 금지된 욕망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한 여자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벌이는 싸움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정식분석학의 고전적 이론들을 몇 개나 불러와도 될 그런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뻔한 만큼 강력합니다. 오래되었다는 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말이거든요.

 

10년 전에 LG 아트센터에서 뮤지컬로 한 번 보았던 작품인데, 이번에 25주년 기념공연(2011 10, 로얄 알버트 홀 공연)이 블루레이와 DVD로 나왔더군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보았습니다. 내친 김에 영화로 제작된 2004년 버전까지 내리 훑었더니 할 말이 많네요.

 

2011년 25주년 [오페라의 유령] 기념공연


동일한 이야기임에도 이것을 극장에서 뮤지컬로 보는 것과, 편집된 영상으로 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뮤지컬은 관객의 시선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무대 위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모두 다 찾아내 본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도 않거니와 배우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 찾아볼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크리스틴이 라울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팬텀이 크리스틴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인지 아니면 뮤즈로 대하는 것인지 해석을 위한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 심지어 인물들은 대사의 90% 이상을 노래로 처리합니다. 노래의 가사로 각각의 인물의 세밀한 감정을 파악해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인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25
주년 기념공연을 블루레이로 감상하니 이야기가 전혀 다른 형태로 다가옵니다. 극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카메라로 하나하나 잡아내는 방식으로 편집이 되어 있더군요. 와이드로 무대 전체를 잡았다가 특정 인물을 클로즈업한다거나, 무대 위에서 내려다 보기도 하는 등 실제 뮤지컬 관객이라면 불가능한 시점이 2시간 넘게 이어집니다. 팬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든가, 라울이 근심어린 표정을 한 채 한숨을 쉰다든가 하는 감정들을 담아냄으로써 인물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오게 됩니다. 장점도 있지만 이것은 위험한 차이입니다.

 

2004년작 영화는 더합니다. 영화는 뮤지컬에는 나오지 않는 세부적인 정보들을 추가하여 인물을 보다 구체화시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린 크리스틴이 극단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라든가, 팬텀이 크리스틴을 지하미궁으로 데려가는 것을 방관하는 마담 지리의 모습같은 것들이 첨가되었고, 각 인물이 구체화된 대신 조금은 제한되고 맙니다. 특히 이 영화는 크리스틴을 순수함의 결정인 양 포장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과도한 빛처리와 반사판의 남용은 크리스틴을 베아트리체로 보이게 만듭니다. 전 이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건 지극히 남성적 시선의 베아트리체거든요. 수동적이에요. 너무나. 아버지와 천사만 찾아대는 연약한 여주인공이라니. 냉소적으로 본다면 크리스틴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보호자는 누구인가요.'만 찾는 여자거든요.

 

2004년 영화로 제작된 [오페라의 유령]


하지만 기본 골격이 워낙 재미있는 구석이 많고, 무엇보다 음악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영화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없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전성기 작품들은 영혼을 팔아서 작곡을 했나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죠)

 


[오페라의 유령] '가면'이라는 모티브에서 알 수 있듯이, 온통 이중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아가 된 크리스틴에게 '팬텀'은 얼굴 없는 후원자였으며 아버지이자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틴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죠.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머니조차 버린 자신을 크리스틴는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딸과 같은 크리스틴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팬텀이 극장주를 협박하며 크리스틴에게 주려고 한 배역은 성녀가 아닌 요부에 가깝습니다. 남편인 늙은 백작 몰래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백작부인이라든가, 돈 주앙의 유혹이 넘어가는 여주인공 같은 역할을 크리스틴에게 요구합니다.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보니 극 속의 극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그 때마다 크리스틴은 베아트리체와 요부라는 두 가지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는 베아트리체로서의 크리스틴이지만 다른 하나는 팬텀이 지시한 배역 속의 요부입니다. 이것은 남성의 욕망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욕망이기도 합니다.

 


동굴 속의 괴물은 단지 남성 심리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굴 속의 미로라는 것은 자궁, 혹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동굴 속 괴물은 잠재된 욕망, 금지된 욕구 같은 것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팬텀은 크리스틴의 잠재된 죄의식일 수도 있으며, 라울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팬텀의 가면에 가려진 반쪽짜리 괴물은 모든 사람의 얼굴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극 공연이 끝나면 반인반수(
半人半獸)인 사티로스(satyros)가 등장하는 사티로스극으로 마무리가 지어지곤 했습니다. 사티로스극의 상당수는 상당히 퇴폐적이었는데 여기서 사티로스는 성적 상징물로 사용되곤 합니다. 즉 얼굴의 절반이 괴물인 채로 태어난 팬텀은, 성적 메타포로 기능하는 것이 가능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속 팬텀은 욕망에 충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괴물입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틴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음악으로 위장합니다. 그가 가면으로 감추는 것은 단순히 얼굴만이 아닌거죠. 또한 라울과 크리스틴의 관계를 목격한 후 몇 번이나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하겠노라 선언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정말 끝까지 말과 행동이 다르다니까요. 이 남자. 전 이 점이 조금 재미있습니다. 과거의 괴물들은 모두 솔직했거든요. 용은 용의 모습이었으며, 불을 내뿜어야 할 때 불을 내뿜었습니다. 괴물은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모순되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사람들이 아마도 알아버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괴물과 싸우는 용사가 아니며, 내가 바로 그 괴물이라는 것을.

 

그 덕에 늑대인간은 보름달이 뜰 때에만 늑대로 변신하게 되었고, 흡혈귀는 낮에는 돌아다니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현대의 괴물은 괴물인 자신을 모두 부끄러워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