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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드라마 역적 : 신분 상승의 꿈

by 늙은소 2017. 3. 13.

MBC 사극 [역적]은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로, 후에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모티브가 된 노비 출신 '길동'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지금까지는 주인공인 길동 보다 그의 아버지 '아모개'와 그의 형 '길현'에게 더 눈길이 간다.

아모개는 참봉댁 씨종으로 태어나 평생 종으로 살 운명이었으며, 자신의 자녀들까지 모두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던 아모개는 둘째 아들의 예사롭지 않은 자질을 알아보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종으로 살아온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함을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면천을 하게 된 아모개는 수완을 발휘해 재산을 모으고,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아가는 삶에까지 이른다.

애초에 아모개는 노비의 삶을 벗어나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아 주인 나리에게도 제법 신임을 받는 편이었고, 다른 노비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리더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가정을 꾸려서 밖으로 나가 살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을 참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던 그의 꿈은 아들 때문에 바뀌게 된다. 둘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비 면천이 필요했고, 면천을 해 양인이 되자 다시 더 큰 꿈이 그에게 찾아온다. 큰 아들은 과거를 보게 해 진사를 만들고, 둘째 아들은 무과를 보게 해 장수를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아들들은 그와는 입장이 달랐다. 아버지 덕에 면천이 되어 양인이 된 큰 아들은 노비 출신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의 한계를 먼저 보았고, 과거를 보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음을 이야기하여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겠다 말한다. 둘째 아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자신의 재능을 버리고 그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이야기 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조건 하에서 큰 아들 길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래 걸리기는 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도 했다. 만약 길현이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과거를 보고, 자신의 출신 배경의 최대치인 진사까지 오르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의 아들 대에 가서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며, 손자 정도에 이르면 제법 괜찮은 관직까지 오르는 삶을 꿈꿀 수도 있었다. 신분을 세탁하는 건 어려워도 신분을 상승시키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며 아모개가 길현을 설득했다면 그가 다시 한 번 더 생각을 하지 않았으려나 싶었으나, 아모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바로 자신의 꿈을 접고 아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드라마를 볼 당시에는 아모개가 신분상승의 꿈을 너무 빨리 접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게 조금 아쉬웠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계획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리 해 봐야 어쨌든 더 나은 삶을 살 사람이 길현 자신은 아니라는 점.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길현이 본 적도 없는 미래의 자식과 또 그 손자를 양반으로 만들겠다며 자신의 삶을 그 과정으로(도구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니.... 길현의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이 길현처럼 머리가 좋고 책 읽기를 좋아하며, 근성도 있고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있으리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이 시점에서 최순실과 정유라를 둘러싼 최태민 일가가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최순실이 박근혜를 만난 건 20대 초의 일로, 그녀는 초등학생 무렵 청와대에 들어가 평생을 공주이자 왕비로 살아온 박근혜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40년을 살아온 셈이다. 주인공으로 결정된 사람 옆에서 절대 주인공은 될 수 없는 자신을 확인하며 40년을 살면 어떤 기분일까. 사이비 교주의 딸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돈을 모으고 권력을 행사해도 결국 로열패밀리는 될 수 없었던 삶. 정재계 인사들이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교수, 총장들이 벌벌 기어도 결국 그네들 테두리 안에는 들여 놓아주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어떤 재벌이나 정치권도 이 집안과 결혼으로 엮이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니) 

왕을 모시는 환관이 막대한 재산을 형성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더라도, 어떤 정승 판서도 이들과 혼맥관계를 형성하려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 과정에서 형성된 열등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된다. 최씨 일가가 원한 건 돈이 아니라 권력이었고, 그것도 신분에서 나오는 권력이었을 텐데... 그것을 위해 짜 놓은 그림을 자신의 딸이 몇 번이나 걷어차고 망쳐놓았으니... 이 얼마나 코믹한 드라마인가 말이다.

자신의 세대가 정재계, 학계와 결혼으로 엮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최순실의 다음 세대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하나 정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산과 권력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성공을 거둔다면 다시 그 다음 세대에서는 완벽하게 신분을 상승시켜 돈과 권력 모두를 쥔 세력가로 신분을 탈바꿈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걸 이 정도로 망쳐놓았다는 점에서 정유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저 아이가 이 정도로 멍청하고, 또한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망쳐주어서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자식이 자기 마음 같지 않다는 말을 어른들이 해도 사실 그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가 많다.

보육원 출신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지 너무나도 뻔히 보이고, 그러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정도의 사람에게 무료로 수업을 듣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엄청난 스펙의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나부터도 한 번 강의에 40~50만원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의 성의과 노력을 보란듯이 무시하며 수업을 건성으로 듣거나, 엎드려 눕고(1대1 수업에서). 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에 내가 내 가슴을 치게 될 때가 많다.

나 좋으라고 공부하란 게 아니라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것인데, 아이들에게는 그저 잔소리일 뿐이고, 그게 왜 자기에게 좋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질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자식을 놓고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건 참 무의미한 일이다.

하물며 3대에 걸친 양반 만들기라니. 이 얼마나 헛된 꿈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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