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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여성 상류층 캐릭터에 대한 변화

by 늙은소 2018. 3. 9.

01

드라마 작가로 명성이 높은 김수현 작가는 수십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유사성이 있는 그녀만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해나갔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이화영(김희애)이 치정의 중심인물로 여주인공과 대립각을 세웠다면 [사랑과 야망]에서 김미자(한고은)는 좌절된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이 캐릭터는 다시 [엄마가 뿔났다]와 같은 가족극에서 잘났지만 재수 없는 맏딸로 소환된다. 유사한 캐릭터가 각기 다른 장르를 통해 변주를 시도한 셈이다.

똑부러지는 게 지나쳐 엄마를 가르치려 드는 딸의 이미지는 자신의 욕망을 과감히 드러내는 팜므파탈의 캐릭터와 혼용되었는데

흥미로운 건 이 여성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정보가 그녀의 연인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는 점이다.

 

 

김수현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딸들은 아버지와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삶에 관조적이고 늘 여유있어 보이는 아버지. 딸은 그런 아버지와 더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조금 먼 곳에서 보면 이 아버지들은 무능하며 여유가 지나쳐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 자식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건 미덕일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이건 방관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앞으로 발생한 일에 대해 자신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달리 드라마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속물적이며 이런저런 참견이 많고, 아버지에 비해 교육이나 상식 등이 부족한 것으로 그려진다.

여주인공들은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지리멸렬해하고 증오하며 또한 가르치려 든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딸들로 하여금 내면에 남성적 자아상을 갖추게 하는 요건이 된다.

 

 

[내 남자의 여자]의 이화영(김희애) [사랑과 야망]의 김미자(한고은)은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부모에게 자신이 '아들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화영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저항과 동질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김미자는 죽은 오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죄책감으로 내적 분열을 겪고 있었다

 

김미자가 사랑하는 남자로 나온 박태준(조민기)는 죽은 오빠의 대역과 같았고, 자신의 부모가 소망한 아들의 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태준에 대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라기보다 경쟁에 가까웠고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자아상과의 투쟁이기도 했다

 

 

02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남성 신경증을 앓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딸의 징후가 읽히는 작품이 많았으며 이것은 계급을 초월하는 증상이었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가난한 신데렐라부터 그녀를 핍박하는 상속녀(악녀) 캐릭터까지. 여기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드라마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드라마에는 재벌 2세로 태어나 명진그룹을 운영 중인 기업가 한명인(최명길)이 등장한다.

그녀는 부친인 한회장이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며 누구보다 사랑한 딸이었다.

부녀관계를 통해 한명인은 아버지를 이상적 존재로 받아들였고, 그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탈여성화를 욕망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여자=약자'라는 프레임에서 재벌 2세인 한명인은 자신의 계급으로 인해 약자가 되어 본 적이 없었고, 약자가 아니므로 보통의 여성들과 자신을 분리하는 게 가능했다. 즉 그녀의 탈 여성화는 계급이 만들어준 셈이다)

 

계급적으로 어떠한 유리천장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겪은 성차별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였다.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고, 뛰어난 것도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자이기 때문에 경영에서 제외시키겠다고 한 것.

마땅히 들어갈 수 있다 생각한 영역으로부터 추방당함으로써 아버지와 분리되는 경험을 한 그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를 보완하려는 강박증자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선택은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미대생과 사랑에 빠져 미혼모가 되는 것이었다.

 

'약하고 부족한 남자'를 선택하는 것은 종종 자신이 보통의 남성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선언. 주체성을 가진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한 것이다.

 

 

03

[풍문으로 들었소]는 전작인 [밀회]와 여러모로 겹치는 캐릭터가 많은 편이다.

한정호(유준상)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비싼 유산이라는 양비서는 [밀회]에서 김희애가 맡았던 오혜원에 가깝고, 그 외에도 많은 조연 단역들이 이전 드라마와 겹쳐서 찾아 보는 재미가 있는 드라마였다.

 

그 와중에

최연희(유호정)의 친구인 지영라(백지연)와 송재원(장호일)으로 이루어진 친목 모임에 눈길이 갔다.

 

지영라는 [밀회]에서 오혜원(김희애)의 친구이자 재벌2세인 서영우(김혜은)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친구인 건 맞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친구들.

 

 

이들의 특징은 삶을 지루해한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악녀가 되는 게 아니라 삶이 따분해 장난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이들의 자녀를 통해 대물림된다)

 

어쩐지 이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최근 꽤 보이는 듯 하다.

 

삶이 따분한 것도 이제는 가진 사람의 전유물이 된 것인가 싶다.

한 때는 사춘기를 겪는 10대와 아직 방황해도 될 나이였던 20대 모두에게 허용되었던 '삶의 따분함'

입시에 시달리고 학비를 벌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힘겨운 청춘들에게 허용되지 않게 되면서

'삶을 따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04

소위 말하는 3대 기획사의 걸그룹 뮤직비디오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트디렉터가 [가십걸]이나 [스킨스]같은 작품의 영향을 꽤 받은 게 아닌지 싶은데

앞서 이야기한 '삶을 따분하게 여기는 태도를, 미적으로 포장한 전략'이 여러 장면에서 읽혔다.

 

나른한 표정 속에 지루함과 따분함이 보이는데.. 그게 이제는 특정 계급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된 시대라 계급적 선망을 이런 방식으로 포장했다는 느낌?

 

굳이 뭔가를 갖고 싶어할 필요가 없고 딱히 노력할 이유가 없는 계급 특유의 나른함.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10~20대가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일탈이 이제는 희소한 것이 되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지루함과 따분함을 느꼈다가는 바로 도태되기 쉽고, 잠깐만 자기 자리에서 밀려나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기가 매우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걸 이렇게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