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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우주전쟁 - 공포와 마주하며 걷기

by 늙은소 2005. 7. 29.

우주 전쟁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톰 크루즈

개봉 2005.07.07 미국, 116분


'외계생명체'라는 개념은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전체가 아니며, '지구'라는 이름의 경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선과 악', '신과 인간', '죽음과 생명', '파괴와 창조'와 같은 이원적 개념들이 이로부터 두 개의 이질적 공간에 흡수되었다. 이것은 마치 역할놀이와도 같다. 외계인들이 창조한 지구를 인류가 파괴하는 형태의 역할극이 있는가 하면, 지구를 파괴하려는 외계인들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영웅적 인간형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 선이며, 누가 영웅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극한의 대립형질들 사이의 연결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있다. '선'이 '신'이며, '신'이 '생명'이며 '창조'일 것인가. '악'이 '신'이며, '신'이 '죽음'이며 '파괴'일 것인가.. '악'은 또 하나의'창조'가 될 수 있으며, '생명'은 '파괴'를 자행하기도 한다. 인류와 대립하는 외계인의 등장은 극단적인 두 개의 개념을 소환함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분석대상이 된다.

'우주전쟁'은 외계인에 대한 정의에 있어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파괴자로서의 임무가 그것으로 타협이 불가능하며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었다는 점에서 영화 'Alien'과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일체의 자비도, 동정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인 악이며, 절대적인 공포이다. 여기서 '외계인'은 '악마'를 능가하는 존재로 상승하게 된다. 종교의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악마'는 '신'이라는 상위 개념에 종속됨으로써 인간적인 속성을 내재한다. 그들에게는 순수한 파괴와 순수한 악이 깃들지 못하는 모순이 함께한다. 그것이 '악마'와 우리가 타협하고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alien'이나 '우주전쟁'에서 외계인은 절대악을 행사한다. 거기에 공포가 있다.
두 자녀와 함께 공포의 도시를 탈출하려는 주인공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가족'만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공포 앞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부질없음을 인정하려는 자신이며..삶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움직임을 위해 그는 집념이나 책임감과 같은 도구를 필요로 하게 된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때로 스스로를 향한 집착보다 더 큰 족쇄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어린 딸은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으로부터 대항하는 수단이며, 공포를 마주하지 않은 채 우회하며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울이 된다. 그는 공포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어린 딸의 눈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잔혹함의 결과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가려진 틈 사이로도 세상의 붉은 빛은 새어들어온다.
.............
영화를 본 뒤, 함께 영화를 본 후배와 한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마무리된 그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상대를 향한미련이 아직 남아있는 그는, 그녀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왔다. 답을 생각해내다가 결국 개인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얻게 된 충고 외에는 달리 해줄 말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다. 영화라는 매체 앞에서도..아니 모든 미디어와 정보들 앞에서..나는 온통 주관적 경험과 감성을 쏟아낼 뿐이다. 글을 쓰는 것은 소통하고 싶다는 최소한의 열망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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