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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자기 기만의 패턴

by 늙은소 2010. 11. 30.

1. 자기 기만의 패턴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TED2010, Filmed Feb 2010, Posted Jun 2010, From TED.com
http://www.ted.com/talks/lang/kor/michael_shermer_the_pattern_behind_self_deception.html 
<- 직접 가서 볼 사람을 위한 링크임
<- 위의 영상으로 볼 경우, 자막subtitle을 한글로 지정하고 보세요.

강의의 한글 제목은 '자기 기만의 패턴'이다.
회의주의자이며 Skeptic Magazine을 발간하고 있는 Skeptic.com의 설립자이기도 한 마이클 셔머. [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이 강의 역시 왜 우리는 이상한 것(과학적이지 않은)을 쉽게 믿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이 과학이며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의 구분보다는, 인간은 왜 무언가를 믿게 되는지, 어떤 것을 패턴으로 받아들이는 지에 대한 설명이 더 흥미롭다.
(강의는 초중반까지는 꽤 좋은데, 후반에 들어가면서 주제에서 벗어난 사례들을 풀어놓아 '애초의 주제가 뭔지' 길을 잃게 만든다. 보다 진지하게 접근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후반부가 흥미거리를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아쉽다....)


특정 현상을 패턴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연한 사건의 하나로 치부할 것인가에 따라 인간은 다르게 행동한다. 패턴 결정이 확대되면 전자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패턴이 없는 것 보다는 패턴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 편하다. 생존본능이 개입하면 패턴을 찾으려는 본능은 더욱 강해진다. 패턴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틀리는 경우의 피해보다 패턴이 없다고 생각했다가 틀리는 경우(즉 패턴이 실제 있었다는 뒤늦은 확인)의 피해가 더 크므로, 패턴일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경우에도 인간은 패턴이 있다고 가정하게 된다.

깊은 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내 뒤를 따라오는 남자를 일단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수치상으로는 더 이롭다는 말이 된다. 그가 실제 성폭행범일 가능성이 0.01%라 하자. 이때 나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1. 저 사람은 성폭행범이다. 그러니 사람이 없는 지름길을 버리고 바로 큰 길로 돌아서 가거나, 전화를 해 식구들을 불러내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 패턴으로 결정
2. 저 사람이 성폭행범일 가능성은 10000명 중 1명이다. 1:9999는 무시해도 좋은 숫자이니 그냥 가던 길을 간다.
<- 패턴이 아닌 것으로 결정

2번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경우 발생하는 피해는 100. 확률이 0.01%이라고 해서 피해가 0.01인 것은 아니다.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이 낮아진다고 해도 일단 사고피해자가 나로 결정되면 나는 사망이다. 0.1%의 확률이 0.1만큼만 죽는 다는 의미는 아니니... 2번의 선택은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피해의 크기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선뜻 2번을 선택하기 어렵게 만든다. (즉 손에 확실히 잡히는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2 대신 1을 선택한다)

반면 1번을 선택했다가 틀렸다고 한들, 손해보는 것은 지름길을 포기한 데서 온 시간 소비와 주위 사람들을 조금 귀찮게 한 정도에 불과하다. 더불어 내가 틀렸는지 그 사람이 진짜 성폭행범이었는지 끝까지 알 수 없게 된다. '성공여부'는 미완으로 남는다는. 내 결정이 '적자'였는지 '흑자'였는지 끝까지 확인 불가능한 상태로.

그래서 인간은 믿는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피해가 갈 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현상에 대하여. 이것은 패턴이라고. 나쁜 놈을 더 나쁜 놈이라 믿고, 위대한 분을 더 위대한 분이라 믿는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 사람은 1(패턴으로 결정)과 2(패턴이 아닌 것으로 결정)를 정하기 앞서 1이 틀렸을 경우와 2가 틀렸을 경우의 손해 정도를 판별한다. 1을 선택하고 싶지만 만약 내가 틀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렇다고 2를 결정한다면 돌아올 이익은 얼마인지, 2를 결정했다가 틀렸을 때 입는 손해가 1을 선택했다가 입는 손해보다 더 큰 건 아닌지.

보통은 그 때문에 패턴이 없는 것 보다는 패턴이 있다고, 웬만한 현상을 다 위험할 수 있다고 간주하며 최대한 조심조심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인 상황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산소고기 문제.

만약 지금 먹는 고기가 광우병에 걸렸다면 죽는게 확실하니 웬만해선 먹지 않는게 정답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여기서 1과 2의 손익계산은 앞서의 경우와 반대가 되는데, 2를 선택했다가(고기가 안전하다고 가정) 자신이 틀려 병에 걸리게 될 경우 2번 오류를 확인하게 되는 상황이 잠복기 이후이기 때문에 즉시 실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1번의 손익은 가격차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에 눈 앞의 명확한 계산이 언제 확인될 지 알 수 없는 결과보다 앞서게 된다. 분명한 손해보다는 애매모호한 상태의 지속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지금 먹는 이 고기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인지, 며칠 전에 먹은 햄버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인지 나중에 이를 판별할 수 없기 때문에 2번 선택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니... 1번이냐 2번이냐의 문제는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은 듯.

2. SkepticalLeft.com
위의 강의를 본 다음 skeptic.com에 대하여 찾아볼 겸 검색을 하니 skepticaleft.com 이라는 사이트가 나온다. 한국지부라도 되는가 싶어 들어가봤으나 이상한 분위기.  - -; 뭔가 여기 이상해......
skeptic이 아니라 SkepticalLeft인 이름이 문제였다. 좌에 대한 회의, 즉 우. 아~ 그제서야 고개 끄덕끄덕
글을 몇 개 읽어보았는데 한의학 비판이 꽤 많이 보이는 게 의아하다.

연결된 사이트를 들어가니 이번에는 의사들 커뮤니티 등장.
동양의학이 보수적이고 서양의학이 진보적일 거라 막연히 생각해왔는데(이건 서구지향적 교육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사도 한 몫함), 오히려 그 반대인 느낌. 이상하게 보수주의(라  쓰고 사실은 수구에 가까운) 표방하는 커뮤니티들을 훑어보면 의학계 커뮤니티가 2차 연결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우리나라만의 특징인지... 물론 서구는 서양의학만이 존재하니 동양의학과의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의학이 정치나 사상에 있어 보수적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런 궁금함.

1차적으로는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법학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이것저것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것은 역시 문제일테고, 특정 환자의 병명을 밝혀내야 할 때 패턴이 없다고 여겨 증상들의 일부를 무시하는 것 보다는 모든 증상을 패턴으로 가정하고 온갖 치료법을 대입하는 것이 환자를 살리는데 유리하지 않으려나.
계급적으로는 아무래도 가진자에 속하니 정책 등에 있어 보수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도 제기할 수 있지만....  좀 심하다 싶은.

어쨌든 Skeptic.com이 SkepticalLeft와 전혀 관련이 없는 단체였으나, 서양의 회의주의가 동양의학을 비과학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 이런 상황에서 한의학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들의 비전이나 계획은 무엇인지..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지는 건 왜인지?


3. 위험한 줄타기
역시 위의 강의 연결.
강의 중반부에 도파민과 패턴, 창의성의 연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연자가 의학이나 생리학, 생화학 학자는 아니니까 명확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파민이 과도한 경우 특정 현상에서 패턴을 더 잘 발견하게 되고, 패턴인식은 결국 창의력에도 연관됨을 주장한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패턴이 아닌 것을 패턴으로 보기 때문에 강박증이 생기거나 피해의식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환각과 망상으로 이어져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예술이나 창의적인 사고는 결국 이 위험한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젠장. 이런 "1+1" 판매같으니라고. 사기 싫은 것까지 끼워 파는 재능이라니.


4. 믿음에 갇힌 회의주의의
강의 중 화면

도파민은 신호와 노이즈의 비율 전환에 영향을 끼친다.
도파민의 양이 부족하면 패턴인식률이 낮아져 패턴인 것을 패턴으로 여기지 못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즉 회의적이 되어 믿음이 부족해지고 믿어야 할 것도 믿지 않는 현상 발생)
패턴인식능력이 적당하다면 창의적인 사람이 되지만, 그 양이 과도하면 인간은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패턴인식이 낮은 것을 '회의적인 태도'로 인식한다는 점. 
그러나 도처의 회의주의자는 패턴 인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패턴을 발견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그들 대부분은 다른 믿음을 지닌 자들이지, 믿음을 회의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아니었다.

'회의주의', '회의하다', '회의적으로 보다' 이 말은 좀더 엄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패턴인식을 검증하는 회의와 다른 믿음을 제시하는 회의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