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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5개의 오이와 오피스텔 11층

by 늙은소 2017. 9. 23.

오이를 사러 나가던 길에 생각을 바꿔 나는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가을이 왔는가 싶더니 다시 더위가 찾아온 9월 초. 잠을 엉망으로 잔 탓에 온 몸이 개운하지 못하고 머리까지 무거운 하루였다. 침대에 누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들 사이를 헤짚어가며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머리에 난 구멍을 찾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마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댄 탓에 어느 사이엔가 구멍은 500원 동전 만한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 구멍을 향해 눈을 가져가면 소리를 빨아들이는 암흑이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가려 보이지 않게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며 거울을 볼 때마다 은근한 근심을 내쉬어 본다. 이제는 그냥 두어도 새로운 머리카락이 이 곳에서 자라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어이 손가락은 이제는 거뭇해져버리기까지 한 상처를 들쑤신다.
 
묵직한 머리와 몸을 일으켜서는 과일이라도 사야겠다며 질질 끌고 나온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유흥업소가 즐비한 거리는 자정이 가까워지자 더욱 시끄러워졌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신도시의 밤 12시란 원래 그렇다. 서울에서라면 이 시간에도 3, 4차를 부르며 새로운 술판을 벌이기도 하지만 신도시의 밤 12시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붙잡고 술집 주인은 한 번의 장사를 더 해보겠다고. 택시 기사는 한 탕을 더 뛰겠다며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 덕에 좁지 만은 않은 거리가 늘 혼잡했고, 차량 간의 잦은 마찰사고로 언성이 높아지는 것 역시 흔한 풍경이었다.
 
건물을 나서자 택시와 대리운전사들로 가득한 길이 3줄로 늘어선 차량들 때문에 더욱 시끄러웠다. 하얀 색 택시를 타려던 손님이 무슨 생각인지 다시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일행인 듯한 사람이 차에 타고 있던 이를 내리게 하며 다른 차를 타자고 한 모양이다. 아마도 서울까지 가는 비용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 분개한 택시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욕설과 함께 침을 뱉는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승객를 차에 태우기 위해 굽신거렸던 조금전까지의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낸다. 그래서일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이 왠지 힘이 없어보였다. 소리는 글자가 되었고, 마주 불어오던 바람에 부서져 힘 없이 떨어져내렸다.
 
Damn It!
택시기사를 대신해 욕을 뱉고 싶어졌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가 Damn it이란 말인가.
 
하긴 나는 욕을 썩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욕에 대한 저항감이 너무 큰 탓에 상스러운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내뱉질 못한다. 욕을 해야 할 정도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단어가 적합한 지 찾아내고, 이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 검토하는 과정을 머리 속으로 거치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가버리고 만다. 욕설이란 이런 생각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내뱉어야 진정한 ''이 아니겠는가.


이런 인간이다보니 부정적인 연상이 적은 Damn it 같은 말이 먼저 떠오른 모양이다.

이 단어는 부모가 칼을 들이대고 죽이겠다며 으르렁거릴 때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언어였으며. 훼손되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나가 죽으라며, 태어날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고 내게 욕을 할 때에도 누구 하나 Damn it이라 말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Damn it은 블루스 윌리스가 고층건물을 부셔가며 지켜낸 채권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나는 욕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기억과 이미지에 더 좌우되는게 분명했다. 내게 있어 '욕'이란 기억하기 힘든 과거의 장면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불쾌한 회상을 잠재우기 위해 욕은 봉인되어야만 했다

 

'욕'으로 분류되는 언어들 중 어떤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부하고, 어떤 단어들에는 별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결국 그 언어가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욕에 별다른 저항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욕을 배우는 과정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만약 가족이 서로 욕하며 싸우는 추악한 모습을 보면서 욕을 배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욕을 처음 접한 계기가 잘생긴 남자배우들의 액션영화에서였다든가, 조금 나이가 위인 형들이 사소한 장난 끝에 가볍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을 보았다면.. 같은 단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지금 떠오른 단어가 damn이지?

영어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Dam과 Damn중 무엇을 더 먼저 배웠으려나. 만약 Damn을 먼저 알았다면 Dam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 damn을 떠올리며 얼마나 키득거렸을 것인가.

 

내 기억으로 댐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가 초등학교 2~3학년쯤이었으니, 어떤 아이들은 욕을 먼저 배우고 이후에 댐을 배웠을 것이며, 곱게 자란  아이들은 댐을 배운 다음 얼마 지나 Damn it이란 말을 접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재미있다


 
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후버댐'이다. 이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

팔당댐 같은 게 아니라 어찌하여 본 적도 없는 후버댐이 먼저 생각나냔 말이다.


후버댐은 미국 대통령 Hoover를 기념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이지만 그 보다는 대공황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제안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시험에 나온다며 얼마나 열심히 외웠던지어린시절 강압적으로 익힌 학습의 결과로 후버댐은 뉴딜, 뉴딜은 좋은 것.. 과 같은 단순 자동연상에 깊이 세뇌되어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보니 댐은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혔고, 더불어 Damn it 역시 유쾌하고 긍정적인 단어일 것이라는 쪽으로 상상하게 된다. (욕 보다는 감탄사에 가깝다는 막연한 편견?)

거대한 댐에서 물이 방류되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입밖으로 내뱉으면 어쩐지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풀릴 것처럼 생각된달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미 목적지인 마트였다.
신선한 제품은 모두 팔려나간 마트, 청과물 코너에서 싸게 팔고 있는 과일과 야채를 훑어본다. 먹고 싶었던 과일은 너무 비싸고 상태도 좋지 않아 돈이 아까웠다. 하는 수 없이 오이를 시원하게 해두었다가 깎아먹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런데 문득

오에 겐자브로의 소설이 떠오른다.

자신의 항문에 오이를 끼워넣은 채 목을 매달아 자살한 사내

 

소설에서 그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주인공의 친구일 뿐.

그러나 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에 애통해 할 겨를도 없이, 기이한 죽음의 형태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는 왜 그런 방식으로 죽어야만 했는가'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이다.

 


5개를 한 묶음으로 파는 오이를 살 생각을 하니 왠지 이 중 하나로 누군가의 죽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어진다. 마침 나는 이 근방에 위치한 **오피스텔에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들어가는 방법과 카메라에 찍히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는 경로를 알고 있었다. 사이다를 한 병 사러 편의점에 들러 편의점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오피스텔 후문으로 손쉽게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비상용 엘리베이터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운이 좋다면 괜한 목격자를 만들지 않고도 목적한 11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
잘 하면 완전범죄가 가능하겠는걸?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완전범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이지?


범죄를 완벽하게 계획하여 자신이 잡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로 완전범죄는 쓰인다.

그러나 완벽한 계획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변수는 늘 있기 마련이고, 변수까지 계산한다는 건 자만이 불러온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는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확인하고 싶은 자의 욕망'이라 정의하는 게 더 합당해 보인다.

 

완전범죄는 모든 변수와 우연까지도 자신의 계획을 위해 알아서 조정되리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다. 

자신의 계획에 따른 결과물이 필연적이었음을 세상과 신이 증명해주리라. 그런 기대 속에서 완전범죄는 기획된다.

그는 범죄 행위를 통해 불안정한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자일 뿐이다.

엘리베이터가 11층에서 멈춘다.
이제 나를 구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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