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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스타크래프트의 세계

by 늙은소 2004. 6. 17.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온라인 게임, 전략게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나뉘어진 각각의 게임의 특성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 하겠다. 공군 조종사의 비행훈련을 위해 처음 제작됐다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육성 시뮬레이션인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 낚시(대물낚시광), 건설(심시티 등)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왔다.

게이머가 게임의 1인칭 주체가 되어 게임 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다양한 게임 분야에 적극 도입되었으며, 특히 시뮬레이션게임에 '전략성'이 가미되면서 등장한 삼국시 시리즈는 199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시리즈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컴퓨터와의 게임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 다른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는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등장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국내에 컴퓨터 간의 전화선을 이용한 통신이 처음 시작되고 케텔, 하이텔로 변화되던 1990년대 초반에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대화와 게시판, 자료실 이용을 중심으로 인터넷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1994년 처음으로 통신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어느 노드로 접속했는가에 따라 개개인의 통신속도가 현저한 차이가 있었고 대화방에서 상대방과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온라인 게임의 시작은 이렇게 대화방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끝말잇기게임, 퀴즈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각종 퀴즈방(상퀴방, 음퀴방, 영퀴방 등)과 타자게임방이 있었는데 접속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앉아 한 명이 치는 문장을 따라치는 타자게임방은 정말 할 일 없는 초기 인터넷 중독자들의 애환(?)을 짐작하게 한다.

점차 모뎀 속도가 향상되며 14400, 25600 bps가 등장하고 고속인터넷 시대가 개막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최초의 영감inspiration 그리고 공명resonance-

스타크래프트는 다른 게임과 마찬가지로 영화나 sf소설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 디스토피아의 인류 미래를 그린 테란은 지구와 지구로부터 추방된 유전자 조작인류에 의해 건설된 지구동맹, 지구 동맹의 대항세력 등 여러 파벌로 구성되어 있다. 생존 본능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종족을 흡수하는 저그는 에일리언aliens시리즈를 연상하게 한다. 아서 C. 클락의 저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토스는 지적 외계 생명체에 의한 문화 창조설을 기반으로 한다.

각 종족의 창조 과정과 진화, 전쟁과 고난의 역사는 대서사시를 방불케 할 만큼 길고도 복잡하다.


'젤-나가'에 의해 선택된 미개한 종족이 프로토스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전하는 프로토스의 고대문헌은 재림한 신(젤-나가)과 프로토스간의 반목, 내란, 이어서 '젤-나가'의 크리스탈을 찾아낸 선지자 카스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 프로토스 문명기를 다루고 있다. 분열된 프로토스의 정신링크를 다시 연결하고 크리스탈을 이용해 초능력을 향상시킨 프로토스가 엄격한 신분구조를 확립해가면서 계급간의 역할이 정해지며 권력구조가 발생한다. 이러한 역사는 프로토스의 유닛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며 게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젤-나가'가 두 번째로 실험한 종족인 저그는 순수한 생명력을 중점에 두고 탄생한다. 프로토스가 과도한 에고에 집착했다면 저그는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며 숙주의 유전자를 받아들여 빠르게 변화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들은 다른 종족을 만나면 제거하거나 자신과 같은 돌연변이로 만들어 세력을 확장한다. 에고가 강하여 분리되기 쉬운 프로토스와 달리 저그는 오버마인드라는 정신체가 존재하여 오버마인드가 다른 생명체를 조종하도록 한다. 오버 마인드의 명령을 전달하는 셀레브레이트는 다시 하위 조직에 명령을 전달하며 일체의 불복종이 불가능한 독제체계가 형성된다.


게임은 저그가 프로토스족을 찾아 우주를 떠돌던 중 지구인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프로토스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아둔의 기사단이 왜 암흑기사단이 되었는가와 같은 내용은 게임을 진행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타크래프트는 이러한 대 서사시를 바탕에 깔아놓음으로써 게이머가 게임에 공명resonance할 수 있도록 한다.

게임 디자이너인 데이브 모리스Dave Morris는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세 가지 종족의 특성과 각 종족을 위한 스토리를 프로이트 심리학에 맞춰 해석한다. 테란은 자아ego, 프로토스는 초자아superego, 저그는 원아id를 상징한다. 이러한 종족간의 상징이 게임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장대한 역사적 배경과 종족의 상징성이 게이머 자신이 선택한 종족에 대한 느낌과 태도에 영향을 미쳐 각각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도록 유도한다.


디자이너의 죽음-

좋은 게임은 게이머로 하여금 게임 디자이너가 의도한 방식을 답습하여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고안하고 게임 기획자가 미쳐 예상하지 못한 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앤드류 롤링스Andrew Rollings(Game Consultatn)는 말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이야기한 '저자의 죽음'이 게임에도 해당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목표가 있게 마련이고 그 목표는 몇 가지로 분류된다.

* 무언가를 모은다(점수나 돈, 자원 등)
* 영토를 확보한다(바둑이나 땅따먹기 등)
* 먼저 도착한다(경주형 게임, 혹은 군비경쟁이나 문명발전)
* 발견이나 탐험(보통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됨)
* 다른 플레이어를 쳐부순다(격투기 등)

초기의 게임은 게임 디자이너의 의도가 분명했고 목표가 뚜렷했다. 그러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은 복수의 목표를 이루어내야 한다. 자원을 확보하며 군비를 확장하고 동시에 다른 플레이어를 쳐부숴야 한다. 또한 적군을 찾기 위해 탐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어느 목표에 더 주안점을 두는가라는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승패가 좌우된다.

디자이너는 3가지 종족의 능력차와 장단점을 설정하고 각각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 외에도 대등한 무게의 다양한 목표를 설정하여 게이머가 선택의 순간에 갈등하도록 해야한다. 이러한 복합구성은 전술적 요소(저글링을 하느냐 공중유닛을 사용하느냐 같은 근시적 선택)뿐 아니라 전략적 요소(멀티로 자원을 확보하느냐 소모전으로 가느냐 같은 거시적 선택)에도 적용되어 게이머가 주어진 선택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와 전략으로 게임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도록 한다.




가위 바위 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여러 종류의 유닛이 있고 각각의 레벨과 HP, 공격력이 수치로 표시된다. 누가 더 강하고 공격을 잘하는 지가 어느 정도 분명하다는 말이다. 저그보다 마린이, 마린보다 질럿이 강하다면 게이머는 프로토스를 선택하여 무조건 질럿을 대량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마린보다 저그가 강하고, 저그보다 질럿이 강하고 질럿보다 마린이 강하다면?

가위바위보와 같은 상황은 외부요인에 의해 힘의 균등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상대편이 가위를 낼 것인지 보자기를 낼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정찰하고 상대를 교란하는 작전을 세워야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유닛이 진화에 따라, 혹은 착용한 무기에 따라 가위바위보의 균형관계가 역의 관계로 바뀔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즉 순발력있게 전략을 바꾸는 유연성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게이머로 하여금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이머들은 미세하게 조종된 밸런스 안에서 공평하게 승패를 겨루기를 원한다. 또한 게임을 반복할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보상이 지급어야 한다."

이 말은 게임기획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수긍할 내용이다. 그러나 저 문장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게임을 여러번 한 사람은 초보자에 비해 유리하다. 그렇다면 완벽한 평등을 위해 숙련자에게 불리하도록 게임을 구성해야할까? 그렇다면 누가 기록을 쌓고 경험을 늘리려 하겠는가. 학습에 따른 보상을 보장한다면 초보자는 늘 숙련자에게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사회와도 같다. 새로운 구성원이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밸런싱은 게임 뿐 아니라 사회에도 필요하다.



메딕을 구하라-

이미 잊혀진 어느 광고에 메딕이 등장한 일이 있었다. 결국 권리 문제로 광고가 중단되기는 했으나, 주변 친구들의 증언(?)으로 낯선 로보트가 메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임 잡지나 스타에 중독된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메딕을 구하려고 전 병력을 움직였다는 우스개를 들을 수 있다. (물론 그게 왜 웃긴 이야기인지는 나중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게임 채널이나 게임 잡지에서는 종종 황당한 실험을 하곤 한다.
3 종족의 비슷한 유닛들 간의 달리기 시합, 메딕과 마린을 벙커에 단 둘이 있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같은.. 신체 건장한 남자라면 뭔 일이 나야하는데 왜 조용한가 물어보는 사회자의 질문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것이 스타크래프트의 매력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의 처절한 전투게임에 매력적인 의무병 메딕을 집어넣을 수 있는 여유.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age of empire 2'에도 메딕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신부가 나오지만 그는 배나온 대머리 아저씨라 호감이 가지 않는다. 덕분에 미안하게도 호위도 없이 정찰을 내보내거나 죽게 방치할 때가 많다. 그러나 메딕을 적진에 홀로 남겨두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의 윙크를 본 신체 건장한 남자라면..


블리자드Blizzard는 메딕에게 게이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윙크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줌으로써 무수한 게이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는 다른 여타 게임이 지나치게 진지하여 행하지 못했던 '가벼움'이다.

게임 디자이너인 데이브 모리스Dave Morris는 게임의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고, 나아가 우주를 구하는 지나치게 방대하고 심오한 목표를 가지는 것 보다는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가 단순히 레아공주가 예뻐서 그녀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아주 가볍고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빠져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더 큰 목표를 이뤄나가는 과정이 게임에 몰입하는데 더 효과적이다. 이는 프로도가 엉겁결에 반지를 떠안고 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졸지에 반지 파괴 임무까지 떠맡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저그나 프로토스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임에도 종종 메딕을 위해 전 병력을 움직이는 모험을 한다. 그것이 가능한 세계가 스타크래프트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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