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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취업 알선 사이트의 문제

by 늙은소 2004. 9. 3.

급히 사람을 뽑을 일이 있어 취업 알선 사이트 몇 곳을 기웃거렸다. 예전에는 사람 뽑아주는 파트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는 상황이다. 잡코리아와 인쿠르트 등 두루 돌아다니다 보니, 이 사이트들에 문제가 있음을 알겠다. 대부분의 취업 알선 사이트들은 동일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구성이란 게 눈치작전 펼치며 하향지원 하던 대입원서 접수창구처럼 되어있더라.
...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곳은 '채용정보'란이다. 제일 앞에 위치한 '채용정보' 메뉴는 업종별, 지역별, 연봉 등등 다양한 검색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클릭해보면 회사 이름과 경력제한 등 자격요건만 제시될 뿐 그 쪽에서 뭘 해주겠다는(연봉)이야기는 손톱만큼도 없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회사명을 클릭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필수입력 사항이 아니라 대부분연봉을 미입력 처리함) 다만 이 회사에 몇 명이 지원했는지 경쟁자 수만 파악될 따름이다.(지원자수 열람은 유료서비스임)

또한 이 사이트들은 '연봉검색'서비스를 제공한다. 즉 기업이 제시하는 조건은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얼마를 받고 다녔는지는 파악할 수 있다는 말. 그 때문에 더 높은 점수가 합격하는 대입지원과 반대로, 더 낮은 액수를 제시할수록 유리하게 된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더 낮은 액수를 제시해야 내가 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록에 나와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경력과 연봉은 무의미한 정보일 뿐이다. 더군다나 그 연봉이란 것도 생각보다 낮기 십상이다. 또한 '분야 평균연봉'이란 것도 있는데, 동일한 분야 내에서의 편차가 얼마나 큰데 표준오차 제시도 없이 대뜸 평균 연봉이란걸 내놓는지 모르겠다. 동일한 조건(학력, 분야, 경력..) 속에서도 2배 이상 차이나는 연봉을 평균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제시된 정보의 불평등함과 잘못된 구성이 내 연봉을 스스로 알아서 깎게끔 만들고 있다. 비슷한 경력인 잠재적 경쟁자가 나보다 더 낮은 연봉을 받겠다고 하는데, 희망연봉을 고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그렇다면 인재를 필요로 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인재정보' 메뉴는 상황이 반대인가? 다른 사람들의 상세한 프로필(이력서)을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아쉬운 사람은 늘 구직자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경쟁하다보면 더 낮은 액수,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이 채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회사에 여러 지원자가 몰리는 것처럼 괜찮은 인재에도 여러 회사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개인 정보를 열람할 때, 그 사람의 정보를 몇 군데 회사가 열람했으며, 몇 군데 회사가 면접 제의를 했는지 그 수를 알려주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왜 지원자만 경쟁하게 만들고 기업은 경쟁하지 않는 것인가.

...

대입 지원하던 시절 가장 억울했던 것이 무엇인가? 일단 한 명이라도 더 붙여야한다며 무조건 하향지원하게끔 강요한 담임이 있다. 자기가 말한 학교, 학과가 아니면 원서를 써주지 않겠노라며 엄포를 놓는 담임과 네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며 학생을 어떻게든 기죽여서 말 잘 듣게 만드는 전략 구사하는 담임 등등.. 그 다음으로 원서 마감일까지 경쟁률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비공개로 이루어지기 때문데 커트라인이 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향지원하게 만든 시스템이 있다. 좀 더 좋은 학교, 원하던 학과 커트라인이 알고보니 한참 아래였을 때 찾아온 배신감을 기억하는지..

해마다 입시철이면 커트라인 정보가 아닌, '평균점수' 정보표가 우대를 받는다. 커트라인은 늘 어디까지나 '운'일 뿐이라 그들은 말하곤 한다. 그러나 원서를 쓸 때면전설이 떠돌기 시작한다. 작년 모 학교 무슨 과에 몇 점짜리가 붙었다더라 하는 이야기. 쉬시하며 학생들은 영웅적인 전설을 말한다. 담임과 한판 붙어, 떨어져도 좋으니 원서 써달라 난리를 쳤는데 붙었다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취업사이트에도 이런 전설쯤 나와줘야 한다. 하향지원이 아닌, 상향지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취업 정보 사이트에서는 유치할지라도 '성공시대류' 컨텐츠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썩 좋은 조건이 아니었음에도 취업에 성공했으며, 그 분야에서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식의 스토리를 간간히 보여주는 것이다. 경력과 연봉으로만 파악되는 무형의 경쟁자들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연봉부터 깎고, 없던 경력 만들어 붙이는 많은 구직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건을 화려해 보이도록 치장하고 연봉을 낮추는게 아닌, 자신감과 비전, 희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직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역할모델을 찾아내, 인터뷰 기사라도 올려야 한다.

여러 면으로 봤을 때, 취업 정보 사이트는 구직자가 아닌 기업을 위한 사이트이다. 구직자들로 하여금 알아서 경쟁하게 만들어 낮은 가격을 제시하게 만들고,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몰려들게 만든다. 기업이 많음을 첫페이지에서 보여주어 구직자를 끌어들이고, 그들이 다시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이 얼마나 사악한가. 기업들이 알아서 돈 걷어다 이런 사이트들을 뒤에서 지원해주고 있지 않고서야.. - -;;

* 이력서가 Digital로 관리되는 게 바람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이트 운영하던 때, 신규게임 오픈하고서 설문조사 이벤트를 한 일이 있었다. 객관식 문항 몇 개와 함께, 다양한 의견을 얻기 위해 주관식 문항을 두어개 첨가하였다. 좋은 의견과 아이디어는 주관식에서 나온다. 팀원 4명을 포함하여 나까지 5명이 3일간 그 내용을 모두 살펴봤고 생각보다 대단히 진지하고 훌륭한 의견을 보낸 사람들을 선발해 거금까지 지불했을 정도로.. 사용자들 중에는 생각보다 좋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자료를 일일이 다 검토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결국 초반 일부는 몇 바이트 단위로 잘라내 버리고 만다. 글자수가 너무 적을 경우, 좋은 의견은 없을 것이다 단정짓는 것이다. 삭제될 사용자 의견의 글자수 제한을 몇으로 하는가를 놓고 개발자와 기획자가 협상을 벌인다. 열 글자 정도로 하자 합의하는 순간 들어온 설문 중 50% 이상이 날아간다. 열 글자 안에 담긴 아이디어는 빛조차 못보고 사장되는 셈이다.

온라인으로 주고받는 이력서도 마찬가지다. 학벌, 성별, 나이 등 차별을 두지 않겠다고 기업은 말하지만, 모든 정보가 Digital DB가 되면 보다 교묘하게 이를 분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손으로 직접 작성하는 이력서가 아닌 탓에 지원하기 쉽다는 점에서 경쟁률은 더 높아졌고, 열람하고 분류하기가 쉽다는 점 때문에 기업은 채용파트 인력배분을 점점 더 줄여나가고 있다. 봐야할 정보는 많아지고, 볼 사람은 줄어드니 결국 눈에 뜨이는 이력서 몇 개 클릭해서 열어보는 것으로 그치기 쉽다. 그러니 차별이 없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고의적인 차별이 없어졌을 수 있으나, 우연에 의한 소외(아예 내 이력서를 보지도 않는)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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