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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사람 죽이는 타일

by 늙은소 2017. 5. 28.

머리는 하루에 한 번을 감고, 샤워는 하루에 두 번을 한다. 일어나서 한 번. 퇴근 후 집에 와서 한 번.

4년 전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퇴근하자마자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간 다음 옷과 타월을 욕실 안 옷걸이에 걸어놓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찬 물이 몸에 바로 닿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물을 틀기 전 샤워기 헤드가 옆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샤워기에서 나온 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따듯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샤워를 시작했다.


어쩌다 넘어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넘어지던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몇 장의 이미지로 기억될 뿐이었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있어야 할 연속 동작이 떠오르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머리로 벽을 친 게 문제였다. 샤워부스 안이 좁은 편이라 그 안에서 넘어지면 몸 어딘가는 벽에 닿을 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그게 머리였다.

쿵!

정신을 차린 후 본능적으로 다친 곳에 손을 가져갔다. 배가 아프면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배를 문지르지 않던가. 뭐 그런 거다. 아프니까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게 되는 것. 그 때까지만 해도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내 손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느 정도로 다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 피다. 이거 조금 당황스러운데?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피범벅이 된 손바닥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샤워기에서 물이 계속 나오고 있던 터라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물과 섞여 욕실 바닥을 붉게 채워나가는 게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맙소사.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어떻게 사용되었지? 이건 등장인물의 죽음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클리셰가 아니었던가? 영화 속 등장인물마냥 머리에서 피 좀 흘렸다고 내가 지금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닌가? 지금 이거 심각한 상황인건가? 하지만 영화에서 그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지 않았나? 알몸인 상태로 사망하면 스릴러가 아니라 19금 성인물이잖아.

난감하군. 사고가 나도 하필... 액션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19금 성인물이 될 판이라니.


이제 막 시작한 샤워를 어떻게 끝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어찌한담. 온 몸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는 게 우선인지,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타월로 감싸는 게 우선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일단 샤워 부스에서 나와 욕실 거울로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친 곳이 머리 뒤쪽이어서 상처를 거울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말랑말랑한 것이 느껴지는게 이전에 알던 내 머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니 뭐야. 왜 이렇게 말랑말랑하지? 푸딩을 만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잠깐만... 머리에 뼈 같은 게 원게 있지 않았나? 뇌를 감싸고 있는 뭐 그런거... 그런거 있었잖아? 이렇게 말랑말랑할 리가 없는 거 아닌가? 설마 이게 뇌인가? 뼈가 깨졌나? 순간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 악몽'에서 자기 머리를 열고 뇌를 긁던 캐릭터가 떠올랐다.

머리를 다친 상태여서 사고력이나 판단력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타월로 머리를 감싼 뒤 욕실을 나와 다른 타월로 몸을 닦으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가는 것과 옷을 입는 것보다 청소를 먼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갈등.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머리를 다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 물론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일 수 있다)

팔이 부러진 거였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팔이 부러진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머리를 다쳤고, 병원에 가능 도중에 혹은 병원에서 수속을 한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 의자에 앉아있다가 그냥 픽 하고 쓰러져 저 세상으로 가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집 청소를 해야 한다.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집안 꼴이 이 모양인 것을 보게 될 어머니를 생각해서 말이다.


머리를 감싼 수건은 이미 피범벅이 되었고, 지금 옷을 입으면 옷에도 피가 묻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옷도 입지 않은 채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쇼파 커버를 정리하고 거실에 지저분하게 놓여져 있는 다 마신 음료수 병도 정리하고, 안 신는 신발을 정리해 신발장에 넣어놓고... 뭐 그런 청소를 피 범벅이 된 채로 그것도 알몸으로 했던 것이다.

(이거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19금+스릴러+액션(?)+공포+블랙 코미디 영화가 아닌가.)


검사 결과 다행히 뼈에 금은 가지 않았고 피부가 여러 방향으로 찢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부분적으로 머리카락을 밀고, 마취 후 상처를 봉합하였다. 모든 처치가 끝난 뒤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약 한 달 정도 병원을 다니며 상처를 소독하고, 실밥을 뽑고,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는 일이 반복되었다.


병원을 다니며 생각했다. 나는 왜 욕실에서 넘어진 것일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답은 간단했다. 욕실 바닥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우리 집 욕실 바닥은 미끄러웠고 그 때문에 이전에도 넘어질 뻔한 일이 제법 많았다. 타일은 원래 미끄러운 거려니 생각해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정도로 다친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정말로 알몸 변사체가 될 뻔 한 게 사실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집 타일이 정말로 보통의 미끄러운 타일이 맞는 것일까?

살면서 지끔까지 경험한 타일의 종류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아주 어릴 때 엄마 손을 붙잡고 다니던 동네 목욕탕부터 여러 곳을 이사하며 겪은 욕실 타일까지 차례로 기억 속에서 되짚었다. 부산 출장길에 묵었던 호텔 욕실은 어느 정도로 미끄러웠지? 친구네 집 욕실은 어땠더라? 수십 개가 넘는 장소의 수십 종류의 타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렸고, 얼마나 미끄러웠는지 회상해보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미끄러운 타일은 내 기억에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욕실에서 미끄러질 뻔한 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 집은 이상할 정도로 욕실 타일이 미끄러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옆 집과 아랫집, 윗 집 등 이 건물에 살고 있는 300여 세대의 욕실 타일들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이 집을 분양할 때 산 게 아니어서 분양받은 사람이 각자 알아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욕실 타일을 골랐는지, 몇 가지 옵션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만약 300 세대가 동일한 욕실 타일로 공사를 하였다면 욕실에서 넘어져 다친 사람이 나 혼자일 리 없었다.

'띵동! 욕실 타일 검사하러 나왔습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럴 수도 없고.

5층에서 누군가 쿵! 하고 넘어지면 얼마 지나 8층에서 누군가 또 쿵! 하며 넘어지는 풍경이 떠올랐다. 관리실에 가서 물어보면 알려나? 이 건물에 욕실에서 넘어져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관리실이 그런 걸 알 리 없다. 나도 내가 넘어져 다친 걸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이 타일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누군가는 이걸 골랐을텐데 그 사람은 이 타일이 보통의 타일보다 미끄럽다는 것을 알고 고른 걸까?

보통 이런 경우 가장 흔한 결론은 '비용절감'이 원인일 때다. 바닥용 타일이 더 비싸서 싼 걸 찾아보니 벽에 사용하는 값 싼 타일을 바닥에 깔았다는 결론. 만약 그렇다면 씁쓸하긴 해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미끄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끄럽기 때문'에 이 타일을 골랐다면 어쩌지? 시중에 나온 타일들 중 가장 미끄러운 타일을 일부러 골라서 채택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는 그런 유형의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미끄러운 타일 살인사건' 같은 걸 기획하는 특이한 살인마 같은 사람이.

...

해가 지날 때마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걸 몸으로 느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이를 탓하기 보다 4년 전 머리를 다쳤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더 자주 하곤 한다. 그리고는 이 미끄러운 타일을 우리 집 욕실에 깔아놓은 익명의 존재를 원망한다. 알몸 변사체가 되는 건 정말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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