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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밤 산책

by 늙은소 2017. 8. 21.

01.

밤마다 산책을 한다.

새로 들어선 디지털단지 앞 불 꺼진 상가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그 옆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가 내부 시설을 구경하며 또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은 아파트 단지를 건너뛰어 안양천까지 일직선으로 걸어간 다음 여길 내려갈 수 있을지 살펴본 다음 되돌아왔고, 그 다음 날에는 오래된 주공아파트 단지 안의 낡은 놀이터를 어슬렁거렸다. 직선으로 걷거나 좁고 구불거리는 길을 택하거나. 밝은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두운 곳을 가슴 졸이며 걷기도 한다. 산책하는 시간이 주로 밤 12시 무렵이다보니 대체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가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

걷다보면 감정의 허영에 빠지기 쉽다.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피곤해진 다리로 애써 지탱하는 기분.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끝에 얼마나 구차한 변명을 마주보게 될 지 알면서도 매일 산책을 반복하다보니 이쯤 되면 이걸 즐기는 건가 싶어진다.

산책을 시작한 지 열흘쯤 되어 이것도 지루해질 무렵. 사은품으로 막대사탕 50개가 배달되었다. 가끔 단 게 필요해 사탕이나 젤리를 살 때도 있지만 이 건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탕이다. 맛이나 모양이 딱 어린아이 취향인 것도 난감했다. 죠스바 사탕이라니... 아이스크림일 때조차도 사 먹지 않던 건데. 대체 이 입맛 떨어져보이는 블루톤의 회색은 뭐람.

여름이라 녹기 쉬운데 어쩌지. 냉장고에 일단 넣어놓고 나가는 길에 사탕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비닐을 벗기고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걸으니 오래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02.

막대사탕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20대 중반 무렵. 한참 츄파츕스를 사먹었더랬다. 레몬맛을 특히 좋아했는데 츄파츕스 레몬맛은 그렇게 인기 있는 상품이 아니어서 가게 몇 곳을 다니며 한참을 찾아야 하나를 살까 싶은 날이 많았다.

대신할 수 있는 레몬맛 사탕은 많았지만 츄파츕스 레몬맛을 고집한 건, 그게 막대사탕이었기 때문이었다. 새콤한 맛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막대기를 입에 물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좋았다. 입 안을 굴러다니는 사탕보다 물고 있을 무언가가 더 필요했던 것인지도.

이걸 아는 남자친구가 가게며 편의점을 돌고 돌아 레몬맛 츄파츕스를 사모았고, 그것으로 작은 사탕다발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기쁘기 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던 사탕다발이었다. 

그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내가 막대사탕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그걸 왜 그리 좋아했는지.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텅 빈 거리를 막대사탕을 물고 걸어다니려니... 동네 양아치마냥 껄렁한 기분이 되어 걸음이 가벼워진다. 한껏 건들거리며 보도블록 사이를 오가기도 하고, 부러 막대기를 입 가장자리에 물고는 신호등을 건너며 서 있는 차량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주변을 흘끗 살펴본 후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사탕이 달린 막대기를 꺼내 들고는 그게 대단히 불량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이 작은 거 하나로 기분이 이리 달라지다니.

 

밤새 비가 왔다. 어제는 산책을 나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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