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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141001 - 재능기부

by 늙은소 2017. 9. 15.

내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는 현재 중학교 1학년으로 남자아이다.

보육원에 온 것은 얼마되지 않으며,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에 의한 가정 폭력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꽤 심각한 수준이어서 현재도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중이다)

 

몇 달 동안 수업을 하며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영민한 편이고 또 한 때 공부를 잘했다며 그런 자신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현재로서는 공부를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이 없으며, 보육원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보육원에 와서 적응하기까지 걸린 2년 동안 학교에서의 수업을 거의 듣지 않은 듯 했고 5~6학년 과정이 그대로 누락이 된 듯 하다.

이 아이를 가르친지 벌써 5개월이 넘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수업을 하니 수학 성적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사고력이나 추론능력 등은 꽤 향상을 시켰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아이도 나를 잘 따르고 있으며 수업 분위기도 크게 문제는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몇 주 전. 수업시간에 쉬운 퀴즈를 내주었는데 이 아이가 말도 안 되는 걸 틀리지 뭔가. 바로 한 자릿수 더하기를 틀린 것이다. (평소 암산능력이 좋은 편이라 이걸 틀린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이를 조금 놀렸더니 문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실수를 한 거라 말하는 것이다.

결국 대화는 '시력'과 관련한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돌아온 답은

'쌤. 저 이 쪽 눈이 안 보여요'였다.

전혀 몰랐다. 미안하다고 말을 한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수업을 하고 돌아와 일주일 동안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후원회장님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니, 두 눈에 시력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육원에서도 알고는 있었으나 아이를 안과에 데려간다거나 안경을 맞춰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여러 달이 지나왔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후원회장님도 한쪽 눈이 시력이 좋지 못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이 걱정할 정도로 나빠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장 병원에 보내야 한다. 이 아이가 약시일 수 있는데 약시는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시력 회복이 가능하지만 나이들수록 회복이 어려워 한 쪽 눈이 더 나빠질 수 있다며 후원회장님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다 사시가 되면 어쩌나 싶고, 잘 안 보이는 쪽 눈 운동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온갖 카페에 가입을 하고 해외 연구 자료까지 뒤져보며 말 그대로 생난리를 치게 되었다. (혼자 이것저것 자료 찾아보다가 아이가 걱정되어서 울기도 몇 번을.....)

 

이 정도로 패닉이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입체시가 좋지 않아 운동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글자를 건너뛰며 읽거나 두통이 발생해 책을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칠판의 글자를 보고 노트에 필기를 하는 행위도 어려운데 눈의 운동능력이 떨어져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그 동안 이 아이가 보여준 모습과 일치했던 것이다. 수업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거나 아이가 협조적이지 않은 날이 종종 있었는데, 그 때의 행동들이 시력의 문제로 해석하면 말이 되는 거다. 평소 머리가 아프다는 말도 자주 했고, 문제를 꼼꼼하게 읽지 않고 대충 읽거나 단어 몇 개를 건너뛰어 읽어버려서 문제를 이상하게 푸는 일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자주 다치는 편이라 몸 어딘가가 멍이 들어서 오는 일도 많았으며, 물건을 잘 떨어트려서 망가트리는 일도 잦았다. (이 아이가 왼손잡이여서, 왼손용 도구 몇 가지를 어렵게 구해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일주일만에 망가트렸던 것)

공부하기 싫어서 엄살을 부리거나 꾀병을 앓는다 생각했는데 내가 오히려 잘 알아보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한 것인가 싶어 되려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미안함과 걱정 속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다시 수업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는데.... 그 안 보인다는 눈 시력이 '0.5'라지 뭔가. (안 보인다며????? 안 보여서 문제를 못 풀었다고 할 땐 언제고!!!!!!)

물론 반대편 시력이 1.0이라 하니 두 눈의 시력 차이가 큰 편인 것도 맞고, 0.5인 눈의 시력이 단기간에 떨어진 것도 맞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 보인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수업을 끝낸 뒤 돌아와 후배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후배 말로는 이 아이가 누나를 좋아해서 일부러 걱정시키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도 다쳐서 걸을 수가 없노라고 말을 해서 난감하게 한 적이 있는데, 내 다음 시간 영어 선생님 앞에서는 해맑게 웃으며 멀쩡하게 수업을 듣더라는.....

 

보이지 않는 수준은 아니라니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왜 억울한 것인가... 걱정과 한숨 속에 보낸 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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