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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20080101-꿈의 기록

by 늙은소 2017. 8. 16.

독립되어 있던 건물이 난개발을 반복하며 증축을 거듭한 끝에 건물과 건물은 모두 연결되었고, 마침내 도시는 하나의 구조물을 형성하게 되었다. 더 이상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며, 모든 길은 건물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곳에서는 어두운 밤이 24시간 계속되었고 골목은 길지 않아 좁은 계단과 육교로 인해 직선의 움직임이 방해되고 있었다.

 

오르고 또 내려서는 작은 계단들의 진행을 몇 번 반복하고 난 뒤 그를 만났다. 이제는 40대 후반으로 보일 만큼 나이든 그는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작아진 몸으로 자신이 이제 곧 노인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움츠러든 몸과 구부정한 자세는 그의 얼굴과 코 밑으로 난 수염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였는데, 눈의 표정은 마지막 기억과 마찬가지로 아이같이 웃고 있어서 그 부조화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급격히 변한 그의 외모에 놀라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내게 지금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가 나를 반기지 않음은 물론이며 돌연한 등장으로 인해 초조해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 그인데... 오갈데 없어진 나는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여기에 왜 왔으며 그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살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인가?
삶을 의탁하리라는 기대를 그에게 품고 있던 것일까?

 

확신에 차기는커녕 될 대로 되라는 심리에 무작정 떠나 와 버린 나는 사실 죽을 장소를 찾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방치된 쓰레기처럼.. 어둡고 습해 썩기 쉬운 장소에 버려진 물건처럼 그렇게 나를 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런 욕구를 어떻게든 달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턱없이 엉뚱한 대상에게 손을 내밀어 버린 것이다.

 

몇 분 뒤 그의 아내가 나타났다. 키가 1미터가 되지 않아보이는 작고 나이 든 그녀는 오자마자 그의 옆에 서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처음 만나는 나를 아무 이유 없이 반겼다. 그녀의 과도한 친절 때문에 벤치에 앉으라던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녀가 건네는 사소한 질문들에 일일이 답을 해야만 했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 온 연약한 철새 취급하는 그녀의 태도는 거북하기보다 오히려 위로의 힘이 강하였기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서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발견한다.

 

대화는 계속되었고 그에 따라 그녀는 점점 젊어졌다. 주름이 사라지며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의 윤곽이 분명해지자,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자 아이처럼 보인다. 자신의 남편이 저지른 부정이나, 그녀의 가정을 파괴해 버리려던 나의 헛되고도 무책임한 계획 따위는 상상해 본적도 없다는 듯. 그녀는 예의 그 순진하고 철 없는, 그리하여 상대에게 한 없이 죄책감만을 안겨 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이 순간 지겨워진다. 그리고 문득. 살고 싶어졌다. 그녀에 대한 멸시와 조롱은 작은 에너지가 되어 피를 돌게 하였고, 비웃음도 결국 웃음이 아니겠느냐며 나는 웃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를 남겨 둔 후 계단을 오르고 육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육교 위에 있다.
늘 어둡기만 한 이 도시의 육교는 가로등조차 없어 붉고 희미한 조명으로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육교 한 가운데에 멈춰선 다음 양 손을 모아 앞으로 내민 후 두 개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두팔을 벌리듯이 허공의 문을 연다. 대문이라 생각하며 연 문의 안쪽에는 옷이 정렬되어 있다. 그것은 너무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평상복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값비싼 옷들이었다. 모든 옷은 두 벌씩 짝을 이루고 있다. 같은 옷이 두 벌씩 걸려 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옷의 수가 많지 않은데다 일률적으로 화려하기만 한 것 뿐이어서 눈으로 보면서도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런 옷으로 옷장을 채울 거라면 그 돈으로 유용한 아이템을 구매하는 게 좋았을 텐데. 이 옷장을 채워놓은 사람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어졌다.

 

남편이 귀가했다. 그는 잔인한 표정이 각인된 채 평생을 살아온 것 같은 사람이다. 검은색 대리석으로 치장한 고급스러운 거실에서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고, 서류 가방을 넘기기 무섭게 그는 이혼을 요구했다. 언젠가 누군가의 입에서든 나왔을 대화.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덜컥 이 집을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겁이 앞선다. 그런 걱정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나타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데 너 같은 여자와 계속 살 줄 알았느냐며, 몇 년 간의 시간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깝다는 그녀는 소리지르며 화를 내다 제 풀에 쓰러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며. 연신 손바닥으로 대리석 바닥을 내리치는 그녀는 온 몸으로 발버둥 쳤고, 그녀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걱정스러운 마음에 된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살아 달라'고 애원하는 내게 그녀는 죽으면서까지 저주의 말을 멈추지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집으로부터 쫓겨나듯 작은 짐가방과 함께 거리를 나섰다.

 

다시 계단을 오르고 육교를 건넜다. 조악한 실내 장식과 성의 없는 간판을 단 상가가 몇 개인가 이어진 장소였다. 작은 직사각형 유리 격자로 벽을 치장한 가게에서 숯을 구워 그 기운으로 고기를 굽고, 여기에 곁들여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미닫이 문을 힘주어 열고 들어가 주인에게 고기를 더 맛있게 굽는 방법을 조언해 주고는 그 작은 행위로도 마치 큰 일을 해낸 사람처럼 뿌듯해 하며 거리로 나섰다.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

 

굽은 골목아래. 굴다리를 마주보는 방향 상가에는 몸을 파는 여자들과 그녀들을 관리하는 중년의 여성이 조금 전 내 옷장에서 본 것과 비슷한 옷을 입고, 이제 곧 들이닥칠 손님들을 위해 화장을 하고 있었다.

2008년 1월 1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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