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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경을 얻고 나이를 잃다

by 늙은소 2023. 1. 31.

아마도 20년 쯤 전부터였던 것 같다.

난시가 생기기 시작했고, 해가 갈수록 시력이 조금씩 나빠졌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풍경이 회색톤으로 바뀌면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아 사물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딱히 안경을 맞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그리 살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힌 모양인데 그 때문에 회사에 다닐 때는 인상을 쓰고 다닌다며 한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안경을 써야하나 싶어 안경점을 방문한 적도 있으나 멀미 때문에 선뜻 안경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15년 쯤 전인가? 즉흥적으로 새벽에 동대문을 가 난시용 안경을 하나 맞춘 일이 있었다.

어찌나 대충 만들었는지 다음 날 안경을 써 보는데 쓰나 안 쓰나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고, 덕분에 그 때 만든 안경을 방치해 놓고는 지금까지 안경 없이 살게 되었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집에서만 일하기 시작한 것이 2018년부터였나보다.

의학 관련 정보디자인을 하게 되면서 거래처가 모두 관련 기관들로 채워졌고, 거래처들 중 외부 미팅을 요청하는 곳이 거의 없다 보니 매일 집에서 일을 하고 동네에서 생활하는 것 외에 따로 바깥을 나갈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동네 산책을 하거나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백화점에 있는 서점을 다녀오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일상이 저런 식이어서 나빠지는 시력에 크게 불편함을 느낄 일이 없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화면이 좀 뿌옇긴 한데 자막을 읽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고, 운전을 하지 않으니 교통정보를 빠르게 캐치할 일도 없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일 년에 3~4번이 되지 않아 낯선 곳을 방문할 일도 없는 삶이 계속되었다. 해가 갈수록 소파에서 보는 TV 화면이 점점 더 희미해졌으나 작업할 때 바라보는 컴퓨터 모니터는 잘 보이니, 나빠지는 시력에 이렇다 할 아쉬움이나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 시간들이었다.

 

바깥 활동이 뜸해지면서 거울을 보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전에 운영하던 사무실에는 출입구를 나서면 바로 전신거울이 있었고 조명도 꽤 밝은 편이어서 딱히 거울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내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에는 전신거울이 없었고, 욕실에 있는 거울은 조명이 어두운 편이어서 좋지 못한 시력으로 내 얼굴을 뚜렷하게 보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몇 년 동안 나는 내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뿌옇고 상이 여러 개 겹친 형태로만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한 달쯤 전 일할 때 사용하는 서브 모니터의 글자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고, 바로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검사를 하고 상담을 받아 안경을 맞췄는데 철저하게 '선명도'에 초점을 맞춘 안경이었다. 왜곡이 너무 심해서 이걸 쓰고는 걸어 다닐 수가 없는 안경으로, 영화를 보거나 TV를 볼 때 도움을 받고 있다. (서브 모니터의 글자 때문에 안경을 맞추러 간 것인데, 정작 이 안경을 쓰고는 일을 하지 못한다. 1미터 이상 떨어진 사물부터 선명하게 보이는 안경으로, 가까운 거리는 오히려 상이 겹쳐 보인다)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와는 다른 사람이 거울에 있었다.

이 정도로 나이가 든 지 몰랐다고 할까. '늙은소'라는 닉네임을 만들 때만 해도 '늙음'이라는 단어가 나와 가깝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사용했던 것인데, 이제는 닉네임에 어울리는 얼굴이 된 것이다.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던 얼굴에서 열 살 이상은 더 나이 든 모습을 발견했고, 그 낯설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면 나이가 든 것은 물론이고 얼굴이 너무 달라서 이게 정말 나인가?? 싶어 진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보이는 거였구나. 아이쿠. 그동안 너무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다녔구나. 아뿔싸.

나이에 안 맞는 옷차림을 하고, 나이에 안 맞는 행동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 든 얼굴에 맞는 태도나 생각이 얼씨구나 하고 따라와 주는 건 아니어서 무엇이 내게 맞는 모습인지 잘 모르겠다.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면 그 적나라함에 부끄럽다고 할까,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을 마주친 기분이다.

 

안경을 하나 맞췄을 뿐인데, 10년이 늙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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