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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황금나침반 : 선택받은 자들만의 세계에 불만을 표하며

by 늙은소 2007. 12. 31.

황금나침반

감독 크리스 웨이츠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니콜 키드먼,에바 그린,다코타 블루 리차드

개봉 2007.12.18 미국,영국, 113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와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곳, 영화 '황금나침반'은 지구의 또 다른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영국 출신 작가 필립 풀먼의 소설을 영화화 한 [황금나침반]은 평행우주 이론을 적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판타지 영화이다. 19세기 말의 유럽과 유사한 풍경의 [황금나침반]은 '매지스테리움'이라는 조직에 의해 정보가 차단되는 세계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데몬과 함께 태어나 살아간다. '데몬'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대화가 가능하고 주인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충직한 하인에 가깝다. 그러나 주인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생사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는 영혼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라 삼촌인 아스리엘 경(다니엘 크레이그)의 보호 속에 성장한 라라(다코타 블루 리차드)는 말괄량이 아가씨로 주방에서 심부름 하는 꼬마나 집시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 숙녀로 성장해야 하는 삶이 불만스러운 라라는 학자이자 모험가인 삼촌 아스리엘 경의 탐험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 떼를 써 보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때 콜터 부인(니콜 키드먼)이 라라를 찾아와 함께 노스폴로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 제안을 해온다.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며 살아간다는 콜터 부인의 말에 라라는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콜터 부인의 자유분방한 태도와 아름다움, 사람들을 쥐고 흔드는 권력에 대한 매혹이 라라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스리엘 경은 노스폴에서 '더스트'의 존재유무에 대한 단서를 막 발견하고 돌아온 참이다. 그는 다시 노스폴로 떠나 '더스트'의 존재를 밝히고, 이를 이용해 다른 세상과 통하는 문을 찾아낼 계획에 차 있다. 그의 이런 계획은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는 '매지스테리움'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 그들은 세계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지배하고 싶어 하며, 그런 이유로 변화와 도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만약 아스리엘 경이 더스트를 통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발견하게 된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의 권위는 추락할 것이다. 매지스테리움은 아스리엘 경을 막는 한편 그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조직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그 방편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로부터 데몬을 분리시키는 '인터시즌'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질문하고 스스로 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자유에 대한 의지, 욕망의 확인 등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황금나침반]에서 '데몬'은 회의하고, 질문하는 또 다른 자아로 등장한다. 라라는 자신의 데몬 판타라이몬과의 대화를 통해 좀 더 나은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비판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아 나간다. 그런 데몬을 분리시킨다는 것. '인터시즌'은 인간으로부터 자유 의지를 박탈하고, 회의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제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동적인 인간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매지스테리움의 음모에 맞서는 라라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을 하나 둘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쫓겨난 아머 베어인 이오렉 버니슨과 두터운 우정을 쌓아 나간다.


[황금나침반]은 많은 판타지물이 그러하듯 주인공의 성장과 모험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어린 소녀가 거대한 적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모험을 하고 선과 악을 구분해 나가며, 자신의 편을 만듦으로써 점차 강해지는 과정은 결국 그들이 성장하게 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강하고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하라는 어른들의 기대가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드리워진 것이다. 그러나 '황금나침반'의 태도는 조금 다르다. 라라를 가로막는 것은 '매지스테리움'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바로 콜터 부인이다. 라라의 황금나침반만을 노리는 매지스테리움과 달리 콜터 부인은 라라에 대한 지배욕과 강한 집착을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라라는 삶의 롤 모델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콜터 부인을 만났을 때 라라는 그녀의 자유로움과 강한 의지를 선망하였었다. 라라는 그녀와 같은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입고서 함께 파티를 돌아다니며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콜터 부인의 삶은 라라가 거부해오던 '숙녀'로서의 삶에 가까웠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외모와 화술로 사교계를 주름잡는 것. 남자들의 세계를 조종할 수 있는 권력은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며 그 시대 여성들이 취할 수 있는 권력욕의 핵심을 보여준다. 라라가 결정해야할 시급한 문제는 거대한 조직과 싸워 납치당한 아이들을 구하는 것 같은 거대한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시대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가치, 아름답고 수동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라는 보수적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해리 포터'가 아버지 세대와 대립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면 '황금나침반'은 어머니와 대립하는 딸의 이야기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계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거부하고 극복하면서 성장해나간다. 계승과 극복은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때로는 엉뚱한 대상을 롤 모델 삼아 뒤따르다 배신감을 맛보기도 하고, 극복할 대상을 끝내 이기지 못하여 자포자기한 채 자신을 방기하기도 하는 것이 성장의 어려운 점이다.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의 대립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이기도 하였다. 해리 포터는 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계승과 극복의 대상 모두를 발견한다. 그는 누구를 계승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극복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한 끝에 성장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라라에게 있어 콜터 부인은 계승과 극복의 대상 모두에 해당한다. 라라는 자유를 원하며 그 자유를 위해 강해지기를 소망한다. 콜터 부인은 분명 강하고 자유롭지만 이기적이었고, 사악하였다. 라라는 콜터 부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 자유와 힘을 갖게 되더라도 그 방법과 가치관이 잘못되었다면 그러한 자유는 필요하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비록 전혀 다른 세계라 할지라도 [황금나침반]은 19세기 말의 유럽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미혼모라는 이유로 딸을 빼앗겼다는 콜터 부인의 말처럼 시대는 아직 보수적이었고, 여성의 권익과 자유는 남성과 동등하지 않았다. 콜터 부인을 온전히 사악하기만 한 존재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여성이 자유와 힘을 갈망할 때 취할 수 있는 태도란 자신의 여성성을 무기로 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는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콜터 부인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계모나 새로 들어온 왕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답고 젊은 그녀는 외부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 들어와 새로운 세대를 억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동화에서 그녀들은 적어도 보수 세력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억압받는 아이들이 공주이거나 귀족으로 보수 세력을 대표하였고 '선택받은 자'로서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분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의 동화에서 계모와 새 왕비는 기존의 가치와 신분 질서를 파괴하는 외부 세력이자 파괴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방법은 잘못되었을지언정 그들의 욕망은 솔직하였고, 그 전략은 치밀하였다. 가끔은 생각해본다. 새엄마에게 구박받는 딸들의 이야기에 대하여. 도대체 세상이 딸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라 역시 '선택받은 자'로서의 고귀함을 지닌 소녀로 등장한다. 황금나침반의 진실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라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밝혀지며 궁극의 고귀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삐치고 말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인공으로 결정된 인물 따위 드라마 '왕과 나'에서 실컷 보고 있지 않은가. ('왕과 나'는 내시도, 무당도, 심지어 내시를 만드는 도제소 칼잡이까지 알고 보니 모두가 양반이라는 철저한 신분 중심 드라마를 표방한다. 양반 아닌 사람 어디 주인공 해먹겠나 싶어 초반부터 삐쳐서 보지 않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황금나침반]의 세계관으로 인해 심기가 편지 않다고 한다. 종교를 비판하고 은유적으로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데, 괜한 헛수고가 아닌가 싶다. 보수 세력의 권위에 도전하기는커녕 보수적인 가치관을 옹호하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알콜 중독 북극곰 이오렉 버니슨까지 왕자 출신이라는데 말 해 무엇 하겠는가. 결국 [황금나침반]은 선택받은 자들만의 모험 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1부의 끝을 맺는다.


오늘도 선택받지 못한 운명의 나는 노스폴로 돌아간 이오렉 버니슨 대신하여 할당량의 알콜을 넘기며 2007년을 마감하려 한다. 다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