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터미네이터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

by 늙은소 2017. 9. 1.

- 2009년 5월 17일

* 주의 : 이 글에는 태권브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터미네이터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

어린 시절 나는 ‘600만 불 사나이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소머즈는 예뻐서 좋았고 맥가이버는 똑똑해서 좋았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하늘을 가리키며 에어울프가 지나간다고 소리쳤고 오디오 이퀄라이저를 보면 전격제트작전의 키트가 떠올라 남몰래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주말마다 그들은 미국을 지키고 더 나아가 세계를 지켰다. 세계를 파괴하는 무기는 왜 그리 많으며, 또 왜 그리 손쉽게 악당들의 손에 넘어가는지. TV속 영웅들은 왜 꼭 1초를 남겨놓고 폭탄을 제거해 사람 간을 들었다 내려놓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떠랴 재미있는 것을.

어느 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맥가이버가 휴지통을 뒤져 무기를 제조하고, 키트가 실없는 농담을 해주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주일마다 죽다 살아났는데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야 하다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화가 치밀었다.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른 채 지구와 함께 사라져버릴 존재라니. 아무 힘도 없는 내가 너무 작아 보여 견딜 수 없었다. 주인공은 아니어도 주인공의 첩보무기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자고 다짐한 것이 그 즈음이다. 하지만 생은 녹록치 않아 태권브이의 강박사는커녕 조수의 조수조차 되지 못한 채 변두리로 물러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국회의사당에 태권브이 조종실이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에 포기한 꿈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에게 너도 참 힘들게 산다며 술이라도 한 잔 건네고 싶은 어른이 되었을 뿐.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돌아왔다. 심판의 날을 겪은 존 코너는 기계군단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스파이더맨은 4편 제작 소식이 들려온다. 더불어 2주 뒤면 트랜스포머가 개봉한다고 하니 여름이야말로 지구를 구하는 영웅들의 계절인 게 분명하다.

어릴 땐 그런 영화 속 주인공을 응원하며 세계를 구하는 양 영웅주의에 빠져드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영웅들이 전투와 전투 사이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생계가 막연한 스파이더맨이 학비가 없어 자퇴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아이언맨에게 가정형편 어려운 스파이더맨의 사연을 들려준다면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크게 한 턱 쓰지 않을까 턱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적당한 짝을 만나지 못해 외로운 엑스맨들에게는 맞선 서비스를, 몸 성할 날 없는 인디아나 존스와 존 맥클레인에게는 노후 건강을 책임질 보험과 은퇴설계를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마음이 쓰이는 것은 역시 존 코너. 정신건강 좋지 않기로는 배트맨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게는 재벌 명문가 후손이라는 보호막이 있지 않은가존 코너는 신분이 밝혀질까 두려워 입원은커녕 친구조차 사귀지 못하는 형편이니 누구보다 외롭고 불우한 운명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그에게는 이렇다 할 초능력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살아 온 과거나 현재가 아닌, 바로 미래 때문에 위협 받는 생을 살아간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삶. 심판의 날이 찾아와도 문제, 찾아오지 않아도 문제. 설령 미래를 바꾸었다 해도 스카이넷이 영원히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존 코너는 평생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일상적인 삶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격할 수밖에 없다. 심판의 날이 온다면 저항군을 조직해 인류를 구하는 영웅의 삶을 살 수 있으나, 만약 그 날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 환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운명. 존 코너의 정신건강을 생각한다면 심판의 날이 와 주는 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이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데 들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런저런 생각하느라 보내고 나니 연민이 깊어져 오히려 영화감상에 방해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락영화를 오락물로 대하지 못하고, 코미디를 코미디로 보지 못하게 된 것. 나보다 너를 더 잘 이해하는 이가 어디 있겠냐며 영화 속 주인공에게 참견하려 드는 걸 보면 역시 늙긴 한 모양이다.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는 변기뚜껑을 왜 닫은 것일까  (14) 2017.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