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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헌트] 망가진 시스템 속에서 외치는 공허한 메시지

by 늙은소 2023. 2. 4.

2022년작

감독: 이정재

출연: 이정재, 정우성

 

* 이 글에는 영화 '헌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세계의 조직이 등장한다.

남한의 안기부와 북한의 남파간첩조직,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쿠데타 세력.

여기서 안기부는 다시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는데 바로 국내팀과 해외팀이다.

영화는 안기부 국내팀과 해외팀 간의 수면 아래 갈등을 노출하며 시작한다.

 

이들의 해묵은 갈등은 조직의 활동 범위가 다른 데서 기인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안기부 국내팀은 조직의 운영방식이 평범한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국내 활동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맞닥트려야 할 거대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운동 세력을 와해시키고 간첩조직을 적발하며 정치적으로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감시하는 것. 일에 있어서는 상당한 치밀함을 요구받지만 크게 실수를 하지 않는 한 목숨까지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꼬리 자르기용으로 쓰이지만 않는다면 꽤나 안전한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 때문에 국내팀 요원들의 생존방식은 조직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시키는 일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것에 있고, 개인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부속품처럼 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조직을 재구성하거나 인사이동을 하기 쉬운 형태가 되었고, 사람이 바뀌어도 비슷한 업무를 연속성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반면 안기부 해외팀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국가가 없는 상태로 활동한다. 외교관처럼 특권을 보장받는 것도 아닐뿐더러, 해외에서 활동 중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가가 이들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른 척해야만 하는 일의 특성까지 갖추고 있다. 해외팀의 활동이 외부에 노출될 경우, 이들의 활동은 철저하게 개인의 일탈로 정의될 것이며 국가는 여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해외팀은 특성 상 조직의 변동이나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일본 팀이 갑자기 독일에서 독일어로 활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소수의 인원이 해당 국가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현지인들을 포섭하고 관리하는 등의 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더불어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가 크기 때문에 조직원들끼리 자신의 목숨을 믿고 맡기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차이로 인해 국내팀은 시스템을 더 중시하게 되었고, 해외팀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두 팀의 차이를 이해하고 영화를 보면 조직 내에 간첩이 있다는 제보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두 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

김정도(정우성)와 박평호(이정재)는 안기부 실무자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해당하는 차장급으로, 국내팀 차장(김정도-정우성)과 해외팀 차장(박평호-이정재)으로 등장한다.

김정도는 오랫동안 군인으로 살아온 인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조사하는 등 고문, 심문 등의 역할을 수행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스템으로, 그 시스템은 일관된 메시지 아래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안기부 차장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에도 그의 목에는 늘 군번줄이 걸려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김정도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런 그가 쿠데타 세력에 가담한 것은 80년대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시스템의 메시지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군인으로 살아온 김정도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해 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명의 권력자를 위해 다수인 국민에게 총을 쏘라는 메시지는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군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정도는 쿠데타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박평호는 해외팀 팀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오면서 동시에 남파간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박평호의 특이성은 안기부 내에서는 수뇌부에 해당하며 해외팀에서는 리더역할을 맡고 있는 그가, 정작 간첩 조직 내에서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간첩 조직 내에서 신뢰를 얻지 못해 왔으며 늘 감시를 받아왔고, 일개 정보원으로밖에 쓰이지 못한다.

박평호의 입장에서 남파간첩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안기부 해외팀 조직원들과 형성된 끈끈한 관계와 조직 내에서의 그의 지위 등을 고려할 때, 간첩 조직 내에서의 그의 지위와 관계성은 턱없이 모자라고 불완전하기만 하다. 박평호가 간첩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북한이 주도한 평화통일'이라는 그림뿐이다.

김정도와 박평호는 표면적으로는 국내팀과 해외팀으로 대립하나, 수면 아래에서 두 사람은 자신의 배후에 있는 쿠데타 세력과 간첩조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고 다시 각자 국내팀과 해외팀을 속여야만 하는 이중 삼중의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두 사람의 정체가 밝혀진 뒤, 영화는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쿠데타 세력이 과연 '최소한 권력자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충실히 이행할 조직인가? 

더불어 북한이 과연 평화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조직인가?

이 질문 앞에서 두 조직은 모두 절망적인 답을 내놓는다.

쿠데타 세력은 조직의 일원이기도 한 목성사 최대표의 죽음에 단 1초도 애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북한은 평화와 전쟁을 손바닥 뒤집듯 결정하는 조직임을 드러냈다. 결국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끝까지 진지하게 매달린 건 영화에서 김정도와 박평호 두 사람뿐이었다.

김정도와 박평호의 실패는 당연한 귀결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자신이 지키고자 한 메시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서기에는 김정도와 박평호 모두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영화 '헌트'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두 남자의 이야기로 기억될 듯하다.

 

2022년 8월 1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