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폴의 이상한 나라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르나

by 늙은소 2004. 6. 14.

마왕에게 잡혀간 니나를 구하기 위해 매 주 이상한 나라로 모험을 떠나던 폴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환상적인 무지개색 통로를 지나야 도착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폴은 니나를 간신히 만나지만 번번이 함께 도망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부잣집 귀한 아가씨인 니나는 현실 세계에서 실종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라질 당시 함께 있던 폴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하다. 니나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추궁에 시달리는 폴은 매 회마다 어김없이 딱부리를 이용해 이상한 나라로의 통로를 연다. 그와 함께 현실 세계는 시간이 정지한다. 현실 세계가 정지함과 동시에 열리는 이상한 나라는 시간의 틈에 존재하는 세계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역으로 폴이 현실로 돌아올 때 이상한 나라의 시간은 정지하는 게 아닐까?

현실세계까지 지배하고픈 대마왕은 니나를 제물로 삼아 자신의 힘을 확장할 계획이다. 만약 이상한 나라에서 변함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폴은 현실세계에서 한가하게 있을 여유가 없다. 위로한답시고 니나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동안 이상한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폴이 현실로 돌아올 때 이상한 나라의 시간이 정지한다면 폴이 현실에 있는 한은 대마왕이 니나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니나를 구하기 위해 이상한 나라로 가는 것이 어쩌면 니나를 더욱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연 폴은 생각해봤을까?

뜬금없이 '이상한 나라의 폴'을 이야기한 것은, 사실 연속극 내부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인지 궁금해진 까닭이다.


국내에서 방영되는 대부분의 드라마는 약 50분길이 한 편을 일주일에 2회 연달아 방영하는 구성을 따른다.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드라마 등이 여기 해당한다. 이 외에도 30분 정도 길이로 월~금까지 방영되는 시트콤류 드라마와 일주일에 1회만 하는 드라마도 있다. 드라마 내에서 시간 진행은 작가 마음이다. 난데없이 30년을 도약하는가 하며, 20분짜리 농구경기 장면을 두 시간으로 늘리기도 한다.(슬램덩크는 후반전 20분 경기를 만화책 6권으로 처리했다) 이들 드라마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한 회의 끝과 다음 회의 시작이 시간상으로 연결되도록 처리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건너뛰어 아역배우들이 성인배우로 뒤바뀌는 장면은 동일한 회 내부에서 교체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일주일이든 하루든 시간차를 두고 방송되는 각 회들이 하나의 시간 축 상에서 일체의 틈을 허용하지 않고 배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시청자들에게 심어준다. 드라마는 한 회가 끝나면 다음 회가 방송되기까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폴이 돌아오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처럼 말이다.


케이블 TV에서는 인기 있는 외국 드라마(대부분 미국 것이지만)를 시즌이라는 단위로 방영한다. ‘Sex & the City', 'Friends', 'ER'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드라마는 하나의 시즌(일년 방영분)이 평균 24회 정도로 이루어진다.(더 회수가 적은 경우도 많음) 주 2회 편성인 국내의 일반적인 방영방식으로 본다면 12주, 즉 3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에 일년치를 방송한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리즈의 인기를 실감한 방송사는 좀더 집중력 있는 편성을 선보인다. 'Sex & the City'는 하루에 2회씩 일주일에 이틀간 방영되며, 'Friends'는 재방송을 포함해 매일 쉬지 않고 만날 수 있다. 드라마가 본질적으로 내부 시간만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각 회의 방영 기간이 다르다면 시청자들은 결국 다르게 시간을 이해하지 않을까?

이런 외화들을 보면 A와 B, C와 D가 사귀다가 헤어진 뒤 각자 짝을 바꿔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뜨거운 사랑을 나눈게 언제인데 3회 정도 지나면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흔한 풍경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가벼울 뿐 아니라 실연의 상처는 오래가는 법이 없다. 나와 사귀던 상대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뻔히 내 눈 앞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도 '쿨'하게 이를 지켜보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경외감마저 생긴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주 2회, 혹은 4회씩 연달아 편성한 국내의 상황과 달리 실제 본국에서 방영될 때 드라마는 여러 달의 기간이 지난 상태이다. 적어도 1주, 혹은 2주 이상씩 틈을 두고 회를 방영해야한다면 각 회가 시간상으로 연결되는 것 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 지어주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다. 결국 시리즈를 구성하는 각 회가 하나의 시간축 위에 배열될지는 몰라도 회와 회 사이에 시간의 틈은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이것을 우리는 압축하여 소비하고 있다.

헤어짐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에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택한 상대를 모함하는 계략을 세우기에 1, 2주 간격은 지나치게 멀다. 시청자는 이것을 기억해줄 만큼 장기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으며 다음 회가 방영되기 직전 전회를 복습해둘 정도로 성실하지도 않다. 결국 이런 이야기들은 'General Hospital' 같은 드라마의 몫이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쿨하다'를 포스트잇에 비유한 것이 떠오른다. 편리하고 깔끔한 포스트잇은 붙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떼는 것에 있어 더욱 진면모가 드러난다. 사랑 역시 포스트 잇 같기를 희망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일 것이다. 이런 '쿨한 사랑'의 단면은 어디서 학습된 것일까? 영화가 물론 큰 역할을 하겠으나, 케이블 각 채널마다 경쟁적으로 편성한 외국 드라마의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연애는 만남보다 헤어짐에 있어 더 놀라운 '쿨함'을 선보인다. 우리는 그들의 드라마를 높은 밀도로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들의 두 달은 우리에게 2주이다. 회와 회 사이에 있어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드라마가 방영되지 않는 시간 동안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청자가 전 회의 내용을 적당히 망각할 바로 그 시간 동안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에 비해 우리의 이별이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은 조금쯤 수정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주 : 어렴풋한 기억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면 현실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고, 그제서야 폴은 이상한 나라로 떠나곤 했다. 폴은 니나를 구할 생각이 있긴 했던 것인지 새삼 의심스러워진다)

'비선형적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대형 문화예술 프로젝트 관람기  (0) 2004.06.14
미적인 것의 변증법  (0) 2004.06.14
거울을 소비하는 방식  (0) 2004.06.14
해변의 카프카  (0) 2004.06.14
검은 생머리의 추억은 가라  (2) 2004.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