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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미적인 것의 변증법

by 늙은소 2004. 6. 14.

99년에 잠시 보았던 책, '상품미학비판' - (볼프강 F,하우크Wolfgang F. Haug)에 나오는 '미적인 것의 변증법을 향하여' 중 일부를 요약, 정리한 글임..


워낙 오래전에 쓴 글이라.. 어디까지가 내생각이고, 어디가 책 본문인지 기억이 잘 안남 - -;;
'주'를 통해 나름의 해석을 덧불여본다.


* 책은 볼만 하고, 보면 좋지만.. 본 사람들끼리.. 서로 동지애, 혹은 전우애를 느낄만함..
.....


역사적으로 미적 공간은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형성된다. 위에서 아래로의 권력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의 시기, 그 벌어진 틈에서 미적인 공간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미는 도덕, 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의 과정에서 확립된다.


미는 도덕과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도덕과 법은 미를 지배하려한다.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은 ‘선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자신들의 가치 체계에 순응하는 것을 미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주: 저항의 시기, 저항의 과정에서 확립된 미적 공간과 가치체계에 순응하는 미는 분명 모순적이다. 그러나 도덕과 법, 윤리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그 변화는 저항의 시기를 거치며 가능했다. 즉 과거의 체계가 존속된 것이 아니기에 저항적 성격, 탈출의 의지를 포함한 미는 사회적 수용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과 법, 윤리가 지닌 근본적인 속성은 보수적이며 권력 지향적이기에 자신과 동일한 역사와 저항의지를 지녔던 미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게 된다.
혁명이 끝난 이후 늘 반복된 혁명가의 분열과 배반의 역사는 이 공간에서도 이루어진다.



칸트는 미적 관심에서, 사적인 것을 배제하여 보편적인 관심성을 내포하는 것을 '미'로 인정한다. 때문에 사적 관심 영역의 사적 논의나 개인적 취향은 무시된다. 그러나 미는 보편적 관심성과 함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편타당한 미와 개인적인 미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성격 때문에 미는 보편성과 특수성 모두를 지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 취향인 특수성의 위험하고도 불안한 공간 보다는, 보편적인 미의 안정된 공간에 소속되고자 한다. ‘보편적인 미의 권력적 기능’ 때문에 이들은 보편적인 미에 참가함으로써 가상의 공동체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소속감을 위하여 미는 소유되어야 하며, 이들의 소유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은 미적 영역에서 가상의 영역으로 변이한다.


주: '가상의 영역'은 단순히 cyber space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 하우크가 어떤 용어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으나(독일어 원본이 없으니 - -;;) 본인의 해석 방식은 예술가의 미적 공간이 그것을 보는 자, 소유(향유)하려는 자들과 만남으로써 다양한 접촉지점이 발생했고 그러한 상호 만남의 네트워크가 형성한 가상의 공간이라는 의미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접촉지점과 접촉 방식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쉽게 예를 들자면 경제적 가치, 조직화의 문제, 언어로 소통하기 위한 추상화의 단계 등등.. 이 될 것이다. 결국 미를 보편적인 미적 공간으로 한정하려는 사회뿐 아니라, 미적 공간 그 자체도 외부와 만나는 과정에서 스스로 보편적 공간을 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미적인 것을 수용하려는 이들 또한 보편적 미를 선택함으로써 위험성을 줄이고자하고 소속감을 성취하려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는 스스로 보편적일 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의 특수성, 개인적 공간의 소외를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가상의 미, 보편적 공간으로 전이한 미는 감각적 개념을 포함함과 동시에 은유로 확대되며, 현실을 통해 해석된다. 이러한 과정은 현실과 내용의 불일치를 야기시킨다. 권력을 지닌 현실은 미적 공간을 현실의 은유로 집어삼킴으로써 내용과 현실간의 간극을 메우고자 한다. 이들은 보편적 미, 절대적 미의 현존을 주장함으로써 모든 특수성의 미를 객관의 미로 해석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객관화 할 수 없는 미는 제거된다)

그러나 미의 영역은 밖으로만 향하지 않고 내부로도 향해 있다. 미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측면이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본질적인 미에 대한 회의가 발생한다.



주: 이것은 권력체인 현실이 미를 제단함에 있어, 미의 근본적인 내적 속성의 완벽한 제거는 결국 미 그 자체를 말살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권력은 철저한 독재를 이룩할 수 있을 지 모르나, 미적 공간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글의 제목이 '미적인 것의 변증법'이 아닐까?


미는 변화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미적 영역은 투쟁의 장이며 운동의 장, 모순된 장이다.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그 현실을 기반으로 존재하며, 적대적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견디어내고, 또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나 미는 다시 현실에, 적대적 상황에 대하여 끊임없이 저항하며, 비판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미는 이데올로기적 권력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



미의 저항적 성격은 비단 사회비판의 메세지가 있느냐의 문제만 이야기함은 아니라고 본다.

저항의지, 탈출의지는 사회라는 거대한 영역뿐 아니라 지극히 좁은, 그러나 한 개인에게는 전부인 한 사람의 모든 것 위에 기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여야 하는 것,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등,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은 개인의 영역이며 동시에 모든 개인이 겪는 갈등이 되기도 한다. 즉 개인적 미와 보편적 미가 양분할 수 있는 확고한 영역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적 공간 역시 개인적 특수성과 보편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변화무쌍한 미적 공간을 어찌 법과 도덕, 윤리가 자를 들이대어 감히 자를 수 있단 말인가!


규정할 수 없는 공간의 미적 속성은, 다시 본질적 미가 있는가의 의문을 잉태한다.

변증법적으로 확대되는 꼬리를 문 의문은 결국 허무주의로 빠져들 위험성을 내포하며, 그것이 바로 20세기 예술 전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우리가 앞서, 나체와 누드.. 예술과 외설을 이야기 한 것..

혹은 허위에 기반한 행복이나, 동화가 선해야만 하는가.. 혹은 만화는 건전해야 하는가.. 의 대화에 있어서.. 나는 허위에 기반한 행복은 거짓이니 폭로해야한다라거나, 동화는 불태우자는 등의 극단적이고도 폭력적인 인간은 절대 아님을 이미 밝혔다.


그러나 나는 보편적 공간의 안정, 다수가 바라보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의심하는 눈을 지닐 것을 선택한 자이며 그러기에 권력에서 소외될 것을 감수하기로 한 자임을 밝힌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밝힌 자를 응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