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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거울을 소비하는 방식

by 늙은소 2004. 6. 14.
나는 사진에 찍히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사진에 포획된 나의 이질적 존재 앞에서 당황하는 것도 싫거니와, 의도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내가 바로 너'라 말하는 것 같아서도 싫다. 사진 속의 나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내놓으라며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거울에 나를 비추는 것은 싫지 않다. 다만 혼자 있을 때여야만 한다. 거울 속의 나를 제 3자가 보거나, 거울 속에서 나 아닌 또 다른 이를 보는 것은 불편하다. 거울은 혼자만의, 아니 '우리'만의 공간이다.

사진에 찍히는 것과 달리 거울을 보는 것에는 계획, 혹은 의도가 담긴다. 내가 존재함을 그 안에서 찾고자 할 때, 즉각적인 만족을 거울은 제시해준다. 물론 거울이 조작된 허상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위안이 필요하다. 내가 살아있다는 위안 말이다.


보이는 행위에는 계획적인 것이 숨겨져 있다. 보이는 행위의 주체는 자신이 보일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계획하지 않을 수 없다. 보여질 것이 계획된 모든 것은 자신을 보는 대상을 만날 때에라야 제작이 완료된다. 피사체일 것을 의도한 모든 사물은 스스로 완전성을 갖추지 못한다.

...

어느 인테리어 회사의 사이트에서 흥미로운 그림 하나를 본 일이 있다.

3D를 실제처럼 잘 만든 그 회사의 포트폴리오는 제법 깔끔하고 세련된 주거공간을 가상의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특정한 장면 하나에 시선을 고정한다. 아무도 없는 욕실이다. 대형 거울이 정면에 들어온다.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맞은 편 내부가 시원하게 드러난다.

욕실은 완벽하게 비어있다. 비어있는 공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순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나의 시선'을 인식하게 한다. 실제를 대치하려던 가상의 공간은 이 순간 완벽한 허상임을 증명한다.

...

'나의 시선'이 등장하지 않으면서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거울을 볼 때 카메라는 약간 기울여 그것을 찍음으로써 카메라의 존재를 감춰버린다. 몰입은 '나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난다. 거울 속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발견한다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을까?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이 보여지고 있음을 인식하며 또한 동시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계획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즉 보는 행위는 보이고 있음과 달리, 계획적이지 않으려 하는 속성이 있다 할 것이다 - 적어도 몰입하기를 욕망한다면 말이다 - 안타깝게도 나는 '나의 시선'을 꽤 자주 인식하는 편이고 그만큼 몰입하기 어려운 인간 유형에 속한다.


자신이 보고 있음을 인식하는 유형은 몰입에 어려움을 느끼기 쉽다. 그들은 차라리 자신이 본다는 사실을 거울 표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관찰하는 자신의 시선을 관찰하는 제 3의 시선을 가지려 한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스스로의 시선을 인식하는 자이며, 그러한 스스로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 무수한 객체의 시선으로 자가 분열하는 자이다.

이것이 내가 거울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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