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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검은 생머리의 추억은 가라

by 늙은소 2004. 6. 14.
'저는 선화씨가 정말 훨씬 더 예뻐요'

문호는 수줍어하며 촌스러운 문장을 그녀 앞에서 힘들여 말한다.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웃는 선화는 다음날 그를 만난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녀의 심각하게 들볶인 파마머리가 문호 뿐 아니라 관객을 황당하게 만든다. 미용실에서 성격개조 풀 옵션을 받은 듯, 이전과 달리 당당해진 선화는 허물없이 문호에게 말을 건네고 두 사람의 섹스는 지극히 가벼운 만남인양 그려진다. 어제까지의 수줍은 긴 생머리 선화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랐을까?

남자들이 검고 긴 생머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은 '순수해보여서'라 답한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검고 긴 생머리의 그녀는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올렸을 때 부러질 듯 가느다란 목을 드러내보였다. 목선을 따라 살짝 비치는 등선이 매혹적이었다'는 식의 표현은 꽤나 상투적이지만 늘 통하는 이미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검은 생머리가 순수와 통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샴푸 광고를 떠올려보라. 긴 생머리의 여주인공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읊어대는 소리가 있다. '머리끝이 살아있어요/ 엉키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요/ 찰랑찰랑해요' 이러한 카피들의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광고들은 역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이 머리끝이 상해있으며, 쉽게 엉키고, 부시시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국인이 '직모'라 누가 말했던가. 실제로 흔히 말하는 '직모'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생머리이긴 한데 두껍고 뻣뻣하여 가볍게 나부끼는 연약함의 상징, 생머리와는 거리가 있다. 결국 남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순수의 상징 검은 생머리의 여인은 인위적인 도움 없이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봐야한다.

...

고개를 돌렸을 때 촤르륵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스트레이트파마를 했다고 보면 된다. 키스하기 직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스트레이트파마를 했다고 보면 된다.

스트레이트파마는 일반적으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전적 의미의 생머리(어떤 효과도 주지 않은)를 남성들이 이상화한 생머리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더 널리 쓰인다. 즉 생머리인 사람이 생머리로 보이기 위해 생머리 파마를 한다는 말. 스트레이트파마는 일반 곱슬거리는 파마보다 더 비싼데다 길이에 따라 비용이 올라가기 때문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찰랑찰랑한 아름다운 그녀의 머리카락의 경우 그 가격을 책정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맛이 가서 충동적으로 미용실에 가 값도 물어보지 않고 머리를 한 일이 있었다. 결국 17만원이라는 한달 책 구매비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비용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내 머리 길이가 단발보다 더 짧은 커트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대체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여학생들은 그 엄청난 비용을 어찌 감당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한 번 생머리 영원한 생머리이면 좋으련만 3, 4개월에 한번씩 스트레이트파마를 반복하며 머리가 상하지 않도록 코팅과 영양마사지까지 해줘야 한다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남자들이 선호하는 생머리의 추억은 '순수의 상징'이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을 살짝 올렸을 때 드러나는 하얀 목? 이 역시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더운 여름 긴 머리카락이 등까지 내려와 있다고 생각해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계절, 그녀들이라고 땀 흘리지 말라는 법 없다. 머리에서 시작된 땀이 목을 따라 등까지 흐르는 그녀, 안쓰럽지 않은가. 이때 순수해 보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이 증발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뒷목과 등에 여드름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그녀가 머리카락을 들어올렸을 때 여드름이 났거나 혹은 그러한 자국이 있다고 하여 그녀를 비난하지 않도록 하자. 그녀도 인간 아니겠는가? 만약 그녀의 뒷목과 등이 하얗고 청순한 투명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녀는 필시 고귀한 신분이거나 신의 축복을 받았거나, 작은 뾰루지 하나에도 피부과를 달려가는 엄청난 인물일 것이니 이 점 염두 하도록 하자.

세련된 정장이 잘 어울리는 그녀에게 통통하고 굳은살 없는 발을 기대하지 말 것이며, 시력이 안 좋은 그녀에게 렌즈를 껴도 충혈되지 않으며 눈꼽 없는 맑은 눈을 기대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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