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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해변의 카프카

by 늙은소 2004. 6. 14.

한 사람의 개인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로부터 잠식당하지 않고 자아를 형성해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반대로 돌아올 길을 만들지 않고 숲에 깊이 들어가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루키는 이미 '태엽감는 새'에서 죽어버린 우물을 통해 타인과의 무의식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지상으로 올라갈 길을 잘라버린 우물 안의 주인공처럼 소년은 돌아갈 길을 제거하며 숲의 깊은 어둠에 스스로를 파뭍는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무성에서 자기의 성(性)적 정체성을 다져나가는 15세, 다무라 카프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계의 경계에 선다. 그곳은 육지가 끝난 지점의 바닷가이며, 시간이 축적된 도서관이며(그러나 현재는 기록되지 않는), 밀도가 사라진 숲의 분지이다. 바로 이 경계에서 시간은 왜곡되며 공간은 뒤틀린다. 그리고 틈이 발생한다. 시간이 멈춘 경계의 틈, 그 곳에서 소년은 부화한다.

소년의 여정은 부화할 공간을 찾아 떠난 본능적 회귀와도 같다.
누락된 기억과 지워진 얼굴(어머니이자 연인이며 누이인)을 다시 그려나감으로써 그는 단절된 시간과 균열된 자아를 봉합한다.

...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인 '조니 워커'는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크로노스와도 같다. 그가 삼키는 고양이의 심장은 미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의 역행적 행위이며 자신의 아들에 의해 제거될 것을 운명적으로 예감하며 그를 기다리는 '저항을 꿈꾸는 권력'인 셈이다.

(카산드라의 저주는 그녀의 저주를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에 있다. 그러나 보다 치밀한 저주의 잔혹함은 저주를 말하는 행위가 저주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일깨우는 경우이다.)

사에키와 나카타, 조니워커나 호시노 등 모든 등장인물들의 유기적 관계의 숨막힘은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었음을 펼쳐보인다. 오이디푸스의 숭고한 비극적 운명의 잠재적 가능성은 각각의 인물 안에 용해되고, 다시 응결한다. 그 결정체의 날카로움이 운명을 직시한 자의 두 눈을 도려낼 만큼 잔혹함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부화한 소년은 돌아올 장소의 의미를 찾았고, 나는 그림자가 조금 투명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