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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자기 오리엔탈화

by 늙은소 2004. 6. 14.
한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의상이다. 패션은 이러한 차이가 즉각적으로 드러나기 쉬운 분야이며, 패션쇼 자체가 환상을 제공하는 쇼라는 점에서 민족적 차이를 오리엔탈리즘의 신화로 탈바꿈하는 것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기 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많은 패션디자이너들은 '한국적인 것', '한국의 미'를 찾는답시고 온갖 민족문화적인 요소들을 끌어다 붙임으로써 해외에서 자기 오리엔탈리즘에 성공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앙드레 김이 있다. 국제적 규모의 행사에는 어김없이 초대되어 늘 똑같은 옷과 연예인 쇼로 '일관'해온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영원한 굴레이자 약점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라 할 것이다.

영화계에서 '해외 영화제에서 선전하는 한국영화'가 주요 테마가 된다면, 패션계에서는 '오뜨뀌뜨르, 쁘레따뽀르떼에 진출한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를 이슈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이 뉴스에 나오더라도 크게 고무되어서는 안된다. 이미 몇 차례 국내 디자이너들이 세계적 패션쇼인 쁘레따뽀르떼에 진출했지만 그들이 무기로 삼은 것은 오로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테마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서구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오리엔탈화한다. 여기서 제시된 '한국적인 것'은 자신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임을 그들이 혹시라도 못알아볼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읽힐 정도로 적나라한 '한국'의 것이다.

조각보로 만든 옷, 고구려 고분벽화를 프린팅 했을 뿐인 천, 혹은 소매를 한복 라인으로 처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며 한국의 미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태도야 말로 서구적 시선으로 자신을 타자화 하는 행위이며, 서구에서 요구하는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적인 미'는 다분히 전략적 선택이 되고 만다. 결국 국내와 해외에서의 작품 발표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앙드레 김의 경우 국내에서는 졸부식 바로크풍 과다 장식패션과 웨딩드레스를 중심으로 선보이지만 해외나 국제행사에 초대될 때는 견이나 마, 삼베 등의 소재와 칠갑산드레스(겹겹이 껴입고 나타나 하나씩 벗는) 같은 보다 한국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여전히 한국의 미를 '한'에서 찾으려 한다.

...

행사 장소와 성격이 사전에 결정되고 거기에 맞춰 작품을 준비하는 패션과 달리, 영화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영화제에 초대되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미발표작이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는 자국 내에서 발표되었던 영화가 모인다는 측면에서 패션에 비해 조금은 덜 '자기 오리엔탈화'가 이뤄진다 하겠다. 물론 해외 영화제 수상을 염두한 게 아니냐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임권택과 몇몇 감독들이 없지 않으나, 서구적 시선을 고려하며 의도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부에서 오리엔탈리즘이 논의 된다면 이미 서구화 된 우리의 시선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역사 소환방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스캔들'이 그런 식의 이해와 함께 비판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남 잘 되는 것 배 아파하기보다는 함께 기뻐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물며 우리 영화가 잘된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즉각적으로 '우리문화의 우수성'으로 연결되는 태도에는 우려가 담긴다. 올드보이가 수상한 것에 왜 '의의'가 뒤따라야 하는가. 그 안에서 '한국적인 무엇'을 발견하려는 이들은 외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한국적 액션', '한국적 멜로'.. 해외에서 선전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어김없이 그 안에서 한국적인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우리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부로 향한 시선은 외부의 지형변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쉽다는 오류를 낳는다.

만약 칸이 '올드보이'에게서 여전히 동.양.적.인.무.언.가.를 찾고자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뻐하기보다 염려해야할 부분이다. 오리엔탈리즘에는 단순히 '차이'에 대한 부각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이 현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차이가 무시되어선 안될 것이나, 여전히 그 차이만을 기대하는 서구의 시선에 타율적으로 의지하여 자기 자신을 타자화 하는 것이야말로 지양해야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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