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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CSI - 과학수사대 : 드라마의 한계성

by 늙은소 2004. 6. 14.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이라나.. 시끄럽게 출발한 CSI 과학수사대는 미국에서도 상당히 성공한 드라마 중 하나이다. 이미 국내 케이블과 정규방송에서도 편성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CSI-마이애미'라는 새로운 팀까지 만들어 동시에 두 개의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CSI'는 설정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출발한다. 그들이 수사기관에 속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수사기관이라 함은 공소를 제기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범인을 발견, 확보하고 증거를 수집, 보전하는 기관을 말한다. 수사기관은 검사와 사법경찰관리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 조직 간의 상하 관계는 매우 뚜렷하여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있다.

'CSI-과학수사대'는 사법경찰관리의 역할과 검사의 역할 일부를 공유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증거를 수집하여 범인을 유추하는 작업이 주된 임무로 주어지며, 이 과정에서 '무죄추정의원칙(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을 배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즉 '그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범인일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모든 증거가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용의자들 중 가능성이 적은 사람을 제외시킴으로써 범인을 찾는 방식이 아닌, 모든 사람을 사건의 범죄자로 대입시켜봄으로써 이들은 사건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이러한 행위가 불편한 것은 대부분의 사건이 일상적인 범죄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 환각제를 복용한 치어리더, 형처럼 되고 싶은 중학생, 미식축구광 등 지극히 일반적인 이들의 비일상적인 행동이 우연과 악의의 중첩에 의해 살인사건으로 표면화 되는 경우가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드라마 초반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부패하고 심하게 훼손된 시체들의 책임을 떠맡기에는 어이 없을 정도로 나약한 범죄자들의 모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이 드라마는 약간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아야한다는 경고를 반복하여 내보낸다. 술집에서 상대편을 응원하는 손님의 뒤통수를 가격할 때에는 10년째 끼고 있던 반지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먼저 확인해야하며, 배우자에게 바람을 펴도 이해하고 이혼에 동의할테니 청부살인하지 말아달라 사전에 말할 것이며,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무척 좋은 사람이니 총으로 그를 쏴죽이지 말라고 당부해야한다는 것 등.. 매우 훌륭한(?) 교훈이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려던 주인공들의 입에서 간접적으로 흘러나온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은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 있어야 할 통쾌함을 감소시킨다.

...

범죄 드라마는 주인공이 수사기관(검사나 경찰 등과 같은)에 속하냐, 변호기관에 속하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낳는다. 주인공이 수사기관에 속한다면 거대한 범죄조직을 대치시킴으로써 액션이나 모험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주인공이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 반대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드라마를 매우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CSI는 그렇지 못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시비나 치정, 배우자의 부정, 동료에 대한 질시 등이 사건의 주요 동기가 된다는 것은 이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바로 우리가 피해자/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 드라마가 지닌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드라마는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선택했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적 범죄의 이면에 도사린 제 2의 책임자가 필요했고, 그것을 돈과 환락, 한탕주의의 도시 라스베가스가 떠안아야 한다. 이후 제작된 'CSI 마이애미'는 라스베가스 팀의 한계를 교훈삼기라도 한 듯 마약문제를 주기적으로 다룸으로써, 일반 시청자들에게 안전한 보호지대를 제공한다. '당신은 범죄와 무관합니다'라는 안전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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