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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이클 클레이튼 : 오점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자의 얼굴

by 늙은소 2007. 12. 30.
마이클 클레이튼

감독 토니 길로이

출연 조지 클루니,톰 윌킨슨

개봉 2007.11.29 미국, 119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01.
인체에 해를 입힐 수 있음을 알면서 이를 묵과한 채 제초제 생산을 지속해 온 다국적 기업 U/North(社)는, 486명의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30억불에 달하는 집단소송에 휘말린다. 협상에만 6년의 시간을 사용한 U/North는 피해자 가족과 유리한 협상을 하기 위해 대형 로펌인 KBL에 변호를 의뢰한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KBL 소속 변호사는 아서 에든스(톰 윌킨슨)로, KBL 내에서 전설로 통할 만큼 철두철미했던 변호사였다. 그러나 아서 에든스는 6년 간 끌어온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존적 질문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에게 있어 6년의 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길었다. 이 사건에 매달린 기간 동안 아내는 병으로 죽었고, 딸은 결혼하여 해외로 떠나갔다. 어느 날 그는 50대를 지나 60대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U/North 사건에 매달린 채 6년을 보내고 난 뒤,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음을. 그리고 생각해본다. '나는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내 존재의 의미를 무엇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협상 테이블에서 난동을 피운 아서는 협상 결과를 뒤엎기로 결심한다 한다. 바로 U/North(社)에게 불리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를 전달하려 한 것. 그의 이런 돌발 행동은 KBL과 U/North 모두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회사로서는 30억불이라는 막대한 보상액을 피해자 가족들에게 지불해야하며,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로펌 KBL은 재판에 질 경우, U/North(社)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다.



KBL에서는 회사 소속의 특수 변호사 마이클 클레이튼(조지 클루니)을 급파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종용한다. 변호사임에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마이클 클레이튼은 조직 내의 뒤처리와 법률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안들을 주로 담당하는 인물이다. 마이클은 아서를 찾아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아서는 약물 과다로 인한 자살로 추정된 채,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마이클은 아서의 집을 조사하여 그가 피해자 가족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기밀문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U/North 소속 법무팀장은 아서에 이어 마이클까지 사고로 위장한 채 제거하려 한다.


02.

[마이클 클레이튼]의 내용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언뜻 보면 이 영화는 거대 조직의 음모를 밝혀내는 영웅적 변호사와 그를 제거하려는 기업 간의 싸움(유사한 내용의 영화는 매우 많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처럼 느껴진다. 정의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는 변호사의 날렵한 움직임과, 킬러를 고용해 방해자를 제거하려는 냉혈적 악인의 대립인 양 예측하게 되는 이 구도는, [마이클 클레이튼]에서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감독 '토니 길로이'는 [마이클 클레이튼]에서 사건 속에 놓인 인물들의 내면과 그들의 취약함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이기 보다는 특정한 상황 속의 인물들을 포착하여, 그들을 입체화 시키는데 노력하는 문학적 작품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카메라는 살인을 지시하는 순간의 카렌 크로더(틸다 스윈튼-U/North의 법무팀장)보다, 킬러를 고용하기 전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거는 그녀의 손과 미숙한 태도들에 주목한다. 청부 살인의 성공여부를 확인하기까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화장실 장면처럼, 영화는 인물들의 사적인 모습을 담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스릴러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이 영화는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03.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할리우드 영화는 그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피해자로서의 자신과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뒤섞은 채 그 경계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 대상과 보복한 대상이 동일한 지 확신하지 못하는 그들은, 피해의식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끼며 현재를 지속시키고 있는 중이다. 미국 내에서도 자성적 영화로 불리는 [마이클 클레이튼]의 정의는 통쾌함을 제공하던 과거의 영웅적 할리우드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정의를 실현하려던 인물조차도 진창에 빠진 자신의 다른 발 하나를 끝내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렇고, 조울증 증세가 있는 아서 에든스 역시 그렇다. 무결점의 영웅 행세를 하기엔 세상의 더러움과 삶의 저열함을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은 중년을 넘어 노년을 향해 나아가는 세대이며 그 과정에서 감추어지지 않는 오점을 만든 나이이기도 하다. 세계 정의를 수호하려던 미국의 이상은, 결점을 자국의 현대사에 포함시키며 미국인들 전체에게 깊은 어두움을 새기게 하였다. '포스트 9.11'에 해당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할리우드 영화의 상당수가 현재 그 어두움에 포획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들의 태도가 반갑지만, 그 얼룩을 면죄부인양 수용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남기도 한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얼굴은 푸석하고 피로한 질감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현재의 미국까지도.


04.

영화 관련하여 글을 쓸 때마다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마케팅에 대한 아쉬움이다. 영화의 장점을 명확히 보여주지 못하는 마케팅 전략은 오히려 관객에게 실망을 주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영화에 대한 기호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각자 기호에 맞는 영화를 선택해 실패할 확률을 낮추는 것이 개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마케팅을 담당하는 쪽 입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홍보해야 할 영화를 최대한 대중적인 것으로 포장해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객 개개인의 만족도가 아닌, 몇 명의 관객이 영화를 볼 것인가 하는 수치의 문제이다. 단순한 공포영화인 것 보다는 반전과 스릴러가 혼재된 영화라고 포장하는 것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낚는 데 유리할 것이다. 결국 범죄 스릴러니 거대 음모니 하는 '그럴 듯한' 용어를 남발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영화 마케팅이 생산되고 있다.


그들에게 개인의 만족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영화 한 편은 일회적 소모품에 가깝다. 만족도가 높다고 해서 한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만족도가 높은 관객의 역할은 입소문과 영화 리뷰, 평점과 같은 형태의 결과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영화 매출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거시적으로 본다면 영화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경우 다른 영화에 대해서도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며,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케팅 담당자와 그 회사들은 이런 것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영화시장 전체의 규모 확대가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회사에 이익이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일 것이다.(많은 기업들은 파이를 키우는 것 보다는 내 몫을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또한 입소문 마케팅과 같은 영역에서 진행하는 활동은 통제가 어렵고 그 결과를 비용으로 산출하여 책정하고 집행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들은 마케팅 비용을 높게 책정해 많은 돈을 받아내야하는 입장이다. 그들의 목적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낚아 올릴 홍보 기획안을 영화사측에 보여줌으로써 높은 비용이 드는 낚시용 홍보물과 광고를 만들게 하는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마케팅 비용으로 책정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 제작비의 상승 중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마케팅 비용이라고 하던데 종종 보면 200만에 적합한 영화를 200만에 맞게 광고하는 게 아니라 600만 짜리인 양 포장하여 부풀려 광고하고 그 만큼 많은 비용을 들여 광고하는 전략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600만용 광고비를 제작비에 포함시키다보니 200만 가지고는 수익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어쨌든 600만인 양 광고를 했으니 적어도 (200+600)/2 를 한 400만 정도는 들지 않겠느냐는 안이한 계산법이 등장하는 것이다.

 

영화 마케팅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싶다. 100만으로 만족해야할 영화를 만들어 놓고는 500만 정도 들 것처럼 광고를 해대는 현실. 그들의 거짓말에 화가 날 때는 과대 광고에 속았을 경우 보다, 좋은 영화의 장점을 싸구려 과대 광고로 둔갑시켜 모욕했을 때가 더 많다.

그래 모욕적이다. 어떤 마케팅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