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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라라'에게서 발견한 '이브'

by 늙은소 2007. 12. 31.

* 경고 : 이 글에는 '황금나침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나침반]은 이야기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 재미있지 않다는 이유로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글을 또 쓰고 있지 않은가-한 달 간 글을 쓰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여자 대 여자이며 동시에 세대간의 대립이기도 한 '콜터 부인'대 '라라'의 싸움은, 영화 '이브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마고의 모든 것을 가로채기 위해 사악한 거짓말을 일삼던 이브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자신 역시 마고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이브에 의해 파멸할 수 있음을 감지한다.


여자 대 여자의 싸움은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회사나 조직에서 만나는 여자 선배들은 여자 후배를 경쟁자로 인식해 이끌어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여자 후배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여자 선배를 끌어 내리려고 기를 썼다. 화장실 험담의 세계. 여자들의 싸움은 화장실에서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상대의 외모나 겉치장, 그들 주위의 남자(사귀는 사람이나 남편 등)를 평가하고 비교하며 경쟁한다. 외모와 젊음에 대한 강한 집착. 부와 권력에 대한 왜곡된 욕망으로 자유롭지 못한 이 싸움은 정당한 힘의 승부 보다는 간악하고 비겁한 뒷거래와 유치한 음모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이것은 선후배만의 싸움에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엄마와 딸의 싸움에도 이런 관계가 끼어든다. 많은 엄마들은 딸에게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것을 강요하다가도, 동일한 대상을 놓고 경쟁하며 서로를 헐뜯는 모순을 저지른다. 딸을 향한 엄마들의 잔소리 중 상당수는 어떻게 옷을 입을 것인지, 헤어스타일과 화장, 쇼핑의 결과에 대한 품평에까지이르며, 잘 팔릴 만한 물건 만들 듯딸을 특정한 회사 브랜드의 인형처럼치장시킨다.그러나 그녀들은 동시에자신의 딸들이가진 젊음과 기회, 자신이 누리지 못한 많은 기회를 소유한 딸을 질투하고 화풀이하는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것이다.

콜터부인과 라라는 수 세대에 걸쳐왔던 엄마와 딸의 싸움을 반복한다. 특히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였던 라그나르와의 대면을 살펴보자. 아머 베어의 현왕인 라그나르는 '데몬'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너덜거리는 인형을 한 손에 꼭 쥔 채 왕좌에 앉아있는 라그나르의 이미지는 유령에 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머베어로서의 자신을 망각한 라그나르는 콜터 부인으로 인해그 욕구가 더욱 강화된 상태에 있었다. 콜터 부인은 라그나르로 하여금'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싶게 만듦으로써' 그를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조종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팜므 파탈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성적인 유혹의 과정에서 종종 여성들은 자신을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포장하여 상대의 소유욕을 부추긴다)

라라는 이렇게 데몬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잡힌 라그나르를 자신의 편으로 돌려놔야 하는 상황이다. 그녀는 콜터 부인이 그랬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라그나르를 현혹시키는데, 바로 자기 자신을 '데몬'으로써 제공하겠다고 공헌한 것이다. -성인 여성인 콜터 부인이 소유욕을 그에게 주입하였다면 소녀인 라라는 아동인 자신을 그에게 제공하는 방법으로 또 다른 형태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만약 아머베어인 라그나르가 성인 남성으로 표현되었다면, 그리고 데몬에 대한 소유욕을 성적인 욕구로 대치시킨다면 이들의 관계와 욕구는 '로리타'에 버금가는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라라의 거래는 콜터 부인의 것과 상당부분 닮아있다. 만약 라라가 정의로운 존재였다면 라그나르로 하여금 아머베어로서의 긍지를 일깨우고 더 이상 '데몬'이 필요치 않음을 역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라라는 라그나르의 약점을 파고들어 그가 스스로 파멸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택한다.


1차전을 끝낸 그들은 이제 동일한 대상, 그것도 한 남자를 놓고 싸우게 될 것이다. (아스리엘 경은 엄마와 딸 사이에 끼인 아버지, 혹은 장모와 아내 사이에 끼인 남편처럼 둔탁하고 무신경한 캐릭터로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라라의 의지는 '엘렉트라 컴플렉스'의 한 면이 되고, 콜터 부인과의 대립은 여성성과 성장을 거부하는 딸의 정신병적 징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


차라리 영화가 이런 방향을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면 어떠했을까 싶다.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결국 여자들 끼리의 싸움인 것이 좀 더 노골적이었다면..
귀엽고 순수해보이던 해리 포터와 달리, '라라'에게 마냥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결국 그 아이의 영악함과 어딘지 모를 차가움 때문이다. 자신이 엄마임을 밝힌 순간에도 일말의 동정심 없이 콜터 부인을 밀어내는 태도에서도, 또한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삼촌이었던 사람을 '아버지'라고 태연하게 부르는 태도에서 나는 그 아이의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겠다'는 이브 다운 면모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여자들의 세상인지 모른다. 착한 아이들의 판타지로 포장된 영화에서 이렇게 마이너한 요소를 보고 오다니... 그런 게 영화보는 맛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