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읽기

명장 : 영웅이 사라진 역사에 대하여

by 늙은소 2008. 2. 6.
명장

감독 진가신

출연 이연걸,류더화,금성무,서정뢰

개봉 2008.01.31 중국, 126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중국은 오랜 역사에 걸쳐 대학살이 자행되는 전쟁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다. 지배 종족과 국가가 바뀌는 전쟁으로부터 내란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인구가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생산기술의 발전 없이 인구가 증가할 때 찾아올 수밖에 없는 자율적인 인구 조정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필수 불가결했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개봉 시 [명장(名將)]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목은 [투명장(投名將)]이다. 세 명의 주인공이 서로의 신의를 확인하기 위해 의형제를 맺으며 작성하는 ‘투명장’은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호전에서 투명장은 ‘투항장’과 같은 의미로, 적에게 귀의할 때 그 결의를 내보이기 위해 사람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형태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명장]에서도 3명의 주인공은 형제의 연을 맺으며, 각자 무고한 외지인의 목숨을 빼앗아 그 피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치른다. 이때 이들이 반복하여 읊는 문장은 ‘남이 내 형제를 함부로 하면 그를 죽일 것이며, 형제가 형제를 함부로 하면 이 또한 죽음으로 갚는다. 같이 살지 못할 바에는 함께 죽는다.’는 내용이다.

이 의식은 서로에게 공범의식을 심어줌으로써 강한 연대감을 형성하게 하며, 무고한 외지인을 죽임으로써 철저한 가족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자신들이 세운 테두리 안의 사람들만을 보호할 것임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즉, 가족 외의 목숨에는 가치를 두지않는다는 결의가이 의식의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것은 산적이던 조이호(유덕화)와 강오양(금성무)을 비롯한 마을사람들 전체에게는 지금까지 중요한의식이었다. 그들은 정부도, 태평천국군도 믿지 않았다. 가난하고 굶주린 채 결국 도둑이 된 집단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책은, 함께 범죄를 저지르고 함께 그 이득을 나누며, 책임 또한 공동으로 지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강한 결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세 사람의 ‘투명장’에는 그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여 모두 함께 ‘형제’가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산’군의 사람들은 투명장 이후 방청운을 ‘큰형님’으로 모신다) 그러나 패배한 싸움의 장군이었던 방청운(이연걸)에게는 가족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백성’과 ‘국가’라는 테두리를 위해서라면 ‘가족’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식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투명장’의 의식은 시작부터 이미 균열을 안고 있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관료는 부패했으며 자연재해까지 찾아와 백성들은 굶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태평천국군은 남경을 장악해 수도로 삼고 인근 지역을 복속시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청나라 보다 서구문화에 우호적이어서 중국 침략을 노리던 세력과 결탁하기 쉬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방청운은 홀로 살아남아 도둑질을 일삼던 무리와 합류하게 된다. 조이호와 강오양을 비롯해 무리 전체가 약탈해온 식량으로 살아가는 마을은,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청의 ‘괴’군에게 핍박받고 있었다. 이를 본 방청운은 이들에게 차라리 군에 들어가 정당하게 식량을 얻는 삶을 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유한다. 그리고 방청운의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세력인 진대인의 휘하에 들어가 ‘산’군을 형성한다.

조이호, 강오양과 함께 방청운은 산군의 이름으로 높은 성과를 올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큰 승리 후 다시 여러 개의 성을 탈환하던 중, 투명장의 의식에 함께 하였던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아녀자를 강간함으로써 이에 대한 처벌을 놓고 처음으로 대립이 시작된다. 가족 외의 목숨이 가족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느냐를 놓고 대립하던 끝에,방청운은 처음으로 조이호와 강오양 앞에서 가족주의보다 더 큰 이상에 대하여 언급하게 된다. ‘가족’의 테두리 외에도 지켜야 할 것이 세상에 많음을 이야기하며 ‘산’군 전체에게 ‘영웅적 삶’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주는 계기로 삼는다. 지금껏 도둑으로만, 자신이 형제로 삼은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해온 이들은 이 때 의식을 확장시킨다.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던 삶이, 가치를 위한 삶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9개월에 걸친 소주성 전투는 그들 모두에게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속된 9개월간의 포위공격은 양측 모두를 소진시킨다. 굶주림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서 방청운이 타협안을 찾아 대립관계이던 ‘괴’군을 찾아가는 동안, 조이호는 홀로 소주성 안에 들어가 성주와 담판을 짓는다. 이때 조이호의 내부에 큰 변화가 한 차례 더 찾아온다. ‘가족’만을 생각해오던 테두리가 방청운에 의해 그 바깥으로 확대되었다면, 소주성 성주와의 만남은 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이호는 소주성을 무혈 함락시키고 걸어 나오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탈바꿈하게 된다.



방청운은 관료들에게 처세술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주의자였다.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직접 빵을 만들어 나누어주기 보다는, 체계 안에서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더 나은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조이호는 소주성에서 나오며 이상주의자로 변모한다. 권력을 획득하여 선정을 베풀겠다는 방청운의 이상은 너무 먼 미래였고, 많은 모순을 밟고 지나간 뒤에라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지금의 486 세대가 노동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현실 정치권 안에서 힘을 획득할 것인가를 놓고 양분되었던 것과 유사한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은 백성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막강해보이지만 결국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할 때가 많은 법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단 한 명이라도 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 위장 취업하던 때가 80년대 우리나라에 있었다.

그러나 방청운의 이상과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이호는 끝내 자신이 맹세한 형제의 의를 저버리지 못해 방청운을 따라 남경탈환에 참여한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 조이호는 더 이상 자신이 필요치 않음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청의 조정역시 자신들을 구한 ‘산’군이 필요치 않음을 깨닫는다. 남경 총독이 된 방청운은 조정으로부터 산군을 해체할 것은 물론이고, 제 2의 태평천국의 난이 되지 않도록 ‘조이호’와 같은 인물을 제거해야 함을 지시받는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은 뒤에는 사냥개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고, 적을 없애 평화로워진 다음에는 군대 또한 필요치 않은 것이다. 조이호가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안 조정은 방청운에게 그를 제거하도록 종용하고, 방청운은 그 요구에 응하게 된다. 그렇게 조이호를 제거한 후 남경 총독의 자리에 오르는 날, 방청운은 총독의 자리를 향해 걸어가던 중 조정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마지막 장면에서 방청운은 등 뒤로 암살자의 총탄을 맞으며, 정면으로는 강오양의 칼에 찔린다. ‘형제’를 배반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국가’라는 이상은 방청운을 끝내 배신하였다. 그의 몸은 ‘가족주의’과 ‘애국주의’의 경계선이 되어, 양측 모두로부터 살해당한다.결국 [명장]은 어느 누구도 영웅이 되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명장]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들은 모두 영웅이 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아니 시대가 영웅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반기지 않았다. 가족주의나 애국주의 모두 무엇이 더 우선한다고 볼 수 없는 개별 가치이다. 결국 이것은 선택이고, 우선순위에 따라 갈등이 생길지언정 그것이 극단적인 형태가 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다. 가족을 챙기면서도 국가를 지켜야 하고, 국가를 지키는 것이 가족을 저버리는 것이 되지 않도록.. 부당한 요구를 할 권리가 국가에는 없다. 그러나 [명장]은 영웅이 사라지기 바라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런 역사 속에서 가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고 대립하는 세 명의 의형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진가신 감독의 첫 무협,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세 명의 이름 있는 배우와 막대한 제작비, 참여한 스테프들의 걸출한 이름들 앞에서 영화는 당당할 만큼 잘 만들어진 모습으로 화면에 오른다. 참혹한 전쟁의 모습과 화려한 액션, 연기를 내뿜으며 요동치는 대륙의 웅장함과 그에 대비되는 산간 마을의 굽은 골목까지, 영화는 완성도 높은 품새로 쉴 틈을 주지 않고 끝을 향해 내달린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몇 년 전 보았던 어느 사진작가의 ‘전쟁사진전’이 떠올랐다. 너무 잘 찍어 아름답기까지 한 전쟁사진들은 굶주려 비쩍 마른 채 죽어가는 흑인 아이들까지 미학적인 구도와 빛의 조화로움으로 화면에 담겨 있어 충격을 주었다. 사진작가가 전쟁을 미적 표현의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아 내내 불편했던 기억처럼, [명장]의 영상은 때로 너무 아름다워 7,000만 명이나 죽었다던 태평천국의 난을 ‘전쟁 스펙타클’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은 불편함을 남긴다. 열기를 가미하여 ‘남성들을 위한 드라마’로 만들어버리지 않았어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조금 더 건조하였더라면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