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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영화

by 늙은소 2008. 4. 3.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

출연 라이언 고슬링,에밀리 모티머

개봉 2008.03.20 미국, 106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평소 어른들을 공경하고 신앙심도 깊은 성실한 남자 ‘라스(라이언 고슬링)’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좀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한 형이 사는 집 차고에서 홀로 생활하는 라스는, 다정다감한 형수가 몇 번씩 찾아와 식사에 초대를 해도 어떤 핑계를 대서든 빠져나가고, 귀여운 직장 동료가 노골적으로 데이트를 신청해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형에게 찾아와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소개를 자청해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그가 데려온 여자가 바로 실물 크기 인형이었던 것. 형과 형수는 라스의 눈에 인형이 실제 사람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걱정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결국 형수는 꾀를 내어 라스와 인형을 데리고 마을 병원을 찾아가고, 그들의 연극에 동참하기로 한 의사는 라스의 인형 ‘비앙카’의 혈압을 재준다는 핑계로 일주일마다 라스와 대화를 시도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라스의 눈에는 왜 인형이 사람으로 보이는 것일까?

라스의 증상은 형수의 임신과 함께 심각해진다.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로 인해 어두운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라스는 죽음에 대처하는 법은 물론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물리적 통증을 느끼며 아파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해왔던 것이다. 라스에게 있어 비앙카는 접촉해도 아프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며, 죽음으로 이별하지 않는 존재이고, 자신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이성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라스는 인형 비앙카를 여자친구로 받아들이면서 가족은 물론 마을사람들, 직장 동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마을 사람들 역시 라스의 인형을 살아있는 사람인양 대해줌으로써 비앙카를 매개로 라스와 관계를 형성해나가는데,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따뜻하게 그려져 마음까지 온기가 전해져온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비앙카는 마을의 일원이 되고, 어느새 인형은 라스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여자 친구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된다. 병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가 하면 시내의 의상실에서 모델을 하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책을 읽어주는 등, 그녀만의 일과가 생기면서 라스는 점점 비앙카가 자신이 이상화한 여자 친구와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인형을 상대로 싸워보기도 하고 질투를 느끼기도 하면서 라스는 비로소 ‘관계’에 부차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소소한 갈등과 이별과 같은 감정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준비를 통해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형에게 비앙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에게 성격을 부여하였던 라스는 어느 날 비앙카가 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이별’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 비앙카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 라스는 마침내 비앙카를 떠나보내고,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봄이 찾아온다.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해진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을 제때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착각하며 살아간다.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전달할 목적으로 정형화된 방식의 표정연기와 연출방법을 선보이고 독백을 동원해 주인공의 감정에 시청자가 동화되도록 유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서럽게 울고 이별을 통보받으면 소리치며 화를 내는 것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규격화된 표현이다. 그러다보니 인간극장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곳의 인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인지 파악하기 어려워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불치병에 걸린 딸을 돌보는 어머니가 좀더 극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표현한다면 좋으련만 어떤지 그녀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할 뿐이다. 이런 차이는 시청자로 하여금 오히려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든다. 감동할 준비를 하고 TV 앞에 앉은 시청자는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인물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더 슬퍼할 것을 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픽션인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감정 표현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이다.

이것은 명백히 우리의 잘못이다. 사람마다 감정이 밀려드는 시기와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헤어졌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일 년 후에야 찾아와 비로소 처음으로 그 사람을 떠올리며 목 놓아 울었던 경험이 있다. 슬퍼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분노해야 할 때 화내지 못한 나는 늘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갑자기 쏟아진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숨어서 울고 화를 내곤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라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비앙카라는 인형을 통해 일생에 걸쳐 담아두기만 했던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계기로 삼는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도, 자신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형에 대한 원망도..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던 라스는 비앙카와의 관계 속에서 이를 표출함으로써 통과의례처럼 온갖 희노애락을 두루 경험하게 된다. 라스에게 이것은 또 다른 성장기이다. 몸은 성장했지만 감정은 전혀 성장하지 못하였던 한 남자가 인형을 매개로 감정을 배워나가는 이 이야기는, 웃음을 유발하는 재치 있는 장면과 미소를 머금게 하는 따스함을 나란히 배치하며 서서히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구조를 차용한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라면 손가락질 하고 변태라며 혹은 정신이상자라 비난할 것이 분명한 라스를 따스하게 포용하는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영화에 약한 편이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길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며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누군가를 토닥여 줄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에 대한 환영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법. 세상 모두가 비웃더라도 우리만은 그러지 않겠다며 넉넉함을 자랑하는 이 사람들 앞에서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되고 싶다면. 당신에게 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