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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 혁명의 무기력한 그림자

by 늙은소 2008. 1. 28.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출연 ,Ion Sapdaru

개봉 2008.01.03 루마니아, 89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동구권이 붕괴되던 때, 우리는 뉴스를 통해 공산주의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며 사람들은 축제에 참여한 이들처럼 들뜬 풍경을 연출했고, 특파원은 격앙된 목소리로 평화의 실현이 멀지 않았음을 외치고 있었다. 그땐 그랬다. 공산주의자가 늑대로 표현되는 반공 만화를 보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의무사항이었고, 그 덕에 나는 10살 무렵까지 북한군은 모두 늑대 모습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볼 만한 프로그램이 몇 없던 토요일 낮이면 울며 겨자 먹기로 '배달의 기수'를 봐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반공과 통일을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로, 달성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궁극의 이상으로 교육받은 채 성장했던 것이다.


베를린 장벽을 시작으로 동구권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오늘은 어느 나라가 항복의 깃발아래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의 품으로 달려올 것인가를 놓고 방송은 연일 시끄러웠다. 민주주의의 승리가 나의 승리인 양 생각되었기에 아이들은 마냥 신나서 평소 보지 않던 9시 뉴스를 열렬히 시청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평화는 과연 찾아온 것일까?




루마니아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을 회고하는 영화이다. 2006년 칸영화제에서 최고 신인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과거가 되어버린 혁명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지 질문한다.


1989년 12월 22일 낮 12시 8분, 독재자 차우체스쿠가 자신의 궁을 떠나며 루마니아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일정 기간을 거쳐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과정을 택했다면, 루마니아는 유혈사태를 겪는 등 보다 극단적인 과정을 필요로 했다. 며칠에 걸친 시위와 폭동 끝에 차우체스쿠는 궁을 탈출하기로 결심하였고, 이 모든 과정이 TV를 통해 생중계 되며 루마니아는 12월 22일, 12시 8분을 분기점 삼아 그야말로 '혁명의 순간'이라 일컬을 만한 경험을 얻게 된다.


그날로부터 16년이 지난 2005년,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은 12월 22일. 수도인 부쿠레슈티 동쪽에 위치한 어느 작은 마을의 지역방송국 사장이자 토론회 사회자이기도 한 즈데레스쿠는, 16년 전 혁명의 날을 기념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려 한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아 참석하기로 한 토론참가자는 당일 아침에 참석을 거부하고, 다급해진 즈데레스쿠는 연금 생활하는 노인 한 명과 알콜 중독자인 역사 선생을 토론회 참석자로 초빙하게 된다. 그들은 한 자리에 앉아 혁명의 날에 우리 마을에서도 혁명은 존재하였는가를 놓고 토론을 시작한다. 12시 8분 이전에 마을 광장에서 혁명을 위한 시위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놓고 토론이 진행되는 가운데, 걸려온 전화는 온통 '우리 마을에 혁명은 없었다.'는 어두운 제보뿐이다. 결국 그들은 혁명의 의미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를 놓고 시끄럽게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들추며 방송은 결론 없는 끝을 맺는다.




토론회가 시작하기 전, 카메라는 도시의 곳곳을 비추며 활기 잃은 사람들의 어두운 표정을 담아낸다.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은 삶 속에서 사람들은 혁명의 날 따위 기억할 필요 없다며 오히려 공산주의 시절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혁명이 무의미해진 현재. 토론회 사회자인 즈데레스쿠는 '과거 우리 마을에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해도 현재의 삶이 나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혁명의 존재 유무에 집착한다. 그러나 차우체스쿠 정권 하에서 비밀경찰을 하던 이는 현재 공장 3개를 운영하는 대 자본가로 변신해 여전히 당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과거 가난하던 이는 여전히 가난할 뿐 혁명의 유무가 현재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혁명이란 이렇게 무가치한 것인가. 그 날의 함성과 흘린 피는 잊어버려도 될 만큼 의미 없는 것이었을까?


혁명은 '12월 22일 12시 8분'처럼 특정한 순간으로 추상화되지 않는다. 12시 8분 이전, 마을 광장에서 시위를 해야만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하며 '혁명'의 정의를 내리고, 그 경계 안에서 혁명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즈데레스쿠의 태도는 혁명을 하나의 순간으로 경험한 루마니아 전체의 태도를 대변한다. 거대한 역사적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그 힘의 규모에 도취되기 쉽다. 물론 그 힘을 발판으로 새로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경험은 과거의 순간이 역사의 임계점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다소 무책임한 낙관론에 함몰될 위험을 안고 있다. 혁명은 축적된 갈등이 그 한계를 넘어서 폭발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해 역사를 이끌어 나가지는 못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변화에의 의지를 우리가 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태도는 이른 아침 하나 둘 꺼지는 거리의 가로등으로부터 시작해, 저녁이 되어 다시 거리를 밝히기 위해 켜지는 조명으로 끝을 맺는다. 혁명은 순간이지만 삶은 계속되는 것.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혁명의 의미는 생각보다 작을 수 있지만, 우리가 작게 생각해온 삶의 많은 부분이 생각보다 큰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