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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할람 포 : 소년은 성장한다.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by 늙은소 2008. 5. 7.

할람 포

감독 데이빗 맥킨지

출연 제이미 벨,소피아 마일즈

개봉 2008.04.30 영국, 95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18세 생일을 앞둔 소년 ‘할람 포(제이미 벨)’는 익사사고로 사망한 어머니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수용할 수 없는 할람은 나무 위 오두막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어머니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은 채, 그녀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자리하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주변 사람들을 숨어서 관찰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가 의심하는 것은 새어머니인 베리티(클레어 포라니). 할람에게 베리티는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 침입자이며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다. 베리티가 어머니를 죽였을 것이라는 그의 추측에는, 베리티를 향한 성적 욕망을 잠재우려는 위장된 분노가 숨어있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할람의 위선적 시선이 엉켜있다.

어느 날 베리티와 말다툼을 벌이던 할람은 감춰 오던 성적 긴장감을 폭발시키고, 새어머니와의 성행위 후 죄의식과 수치심을 안은 채 에딘버러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닮은 여성 케이티(소피아 마일즈)를 발견하고 무작정 그녀의 뒤를 쫓는다.



도시에서도 할람은 여전히 건물의 지붕과 벽을 오르내린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그는 감추어진 도시의 어둠을 찾아 그곳에 몸을 숨기고 타인을 관찰하는 삶을 택한다. 케이티가 근무하는 호텔과 집을 알아낸 할람은 그녀의 직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케이티의 집이 보이는 시계탑에 은신처를 마련한 다음 점점 더 그녀와 가까워진다. 어머니를 이상화해 온 할람에게 케이티는 또 다른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케이티가 호텔 메니저의 정부였음을 알게 되며 그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증오하던 ‘베리티’와 ‘케이티’의 차이는 무엇이며, ‘케이티’와 ‘어머니’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할람 포’는 그리스 비극과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상징을 여러 겹으로 중첩시킨 작품이다. 할람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이성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정신의 불구를 체험한다. 그는 땅위를 걷는 것보다 건물의 지붕을 타고 오르기를 더 선호한다. 그의 정신이 온전한 두 다리를 갖지 못한 채 성장이 멈추었던 탓이다. 할람은 어머니를 상실함으로써, 어머니를 극복하고 그로부터 자신만의 이상적 여성상을 확립하는 단계를 거치지 못하였다. 또한 베리티에 대한 욕망은 그녀가 금기시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으로 이어지고,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 또한 온전히 밟지 못하는 장애가 되었다. 그 때문에 할람은 성장의 단계를 거치지 못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상처와 욕구를 감추기에 급급한 소년으로 멈춰 서 있게 된다.

소년과 어른의 경계는 부모를 극복하고 자아를 형성하는 것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할람 포'에게 있어 '어머니'의 존재는 (타자로서) 이상화된 여성, 여신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동일시하고픈 대상이기도 하다. 영화 첫 장면에 할람은 어머니의 립스틱으로 자신의 유두 주위에 원을 그리고 얼굴에 전사의 문신을 새긴다. 어머니의 옷을 입고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 역시 등장하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어머니와의 근친적 접촉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여성화 하려는 복장도착의 하나로도 볼 수 있다. 할람의 내부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존하고 있으며, 어머니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이 내부의 아니마와 결합하며, 그것이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인지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새겨 넣은 인위적 여성성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할람의 혼란스러움은 카메라의 불확실한 흔들림과 목표를 잃은 시선으로 표현된다. 에딘버러에서 이 혼란은 더욱 심화되는데,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이 둥지를 튼 곳이 시계탑 안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할람은 모든 관계로부터 현기증을 느낀다. 새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베리티’라는 여성 자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인가, 혹은 ‘새어머니’라는 그녀의 위치가 가져온 파괴적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비롯된 감정인가. 에딘버러에서 만난 케이티에 대한 사랑은 그보다 더욱 복잡하게 해석된다. 케이티라는 여성의 매력에 사로잡힌 것인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대체물로서의 기능이 우선인지 할람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거기에 케이티가 가정 있는 남자의 정부라는 사실은 케이티와 베리티 사이에 연관성을 부각시킨다.



스코틀랜드에서 할람은 도전하기에는 벅찬 대상인 아버지를 상대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마치 오필리어처럼 물이 새는 나무 보트를 탄 채 검은 물속에 가라앉았고, 아버지의 권력은 굳건하여 매력적인 베리티를 온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할람은 그들을 훔쳐보는 것 뿐 달리 행동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에서 그는 케이티를 어머니로, 그녀의 불륜 상대인 앨래스데어를 아버지로 대입한 후, 그들의 관계에 침입하여 케이티를 획득함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을 유사 체험한다. 이것은 하나의 통과의례로 할람이 소년의 껍질을 깨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이 과정을 거친 후 스코틀랜드에 돌아왔을 때, 할람은 견고해보이던 성의 쇠락을 목격한다. 굳건해 보이기만 하던 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하였고 재정적 문제까지 겹쳐 약한 인간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할람은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된다. 이상적으로 여겨온 어머니 역시 불완전한 존재였으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던 나약한 인간일 뿐임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오이디푸스’를 연상하게 한다. 테베를 배경으로 한 오이디푸스왕의 전설은 그리스 비극작가에 의해 여러 차례 극화되었다.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인 아이스퀼로스가 신의 절대성을 이야기하였다면 소포클레스는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쪽에 비중을 두었다. 소포클레스의 중기 작품 중 최고의 것에 속하는 ‘오이디푸스’는, 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선대 왕 라이오스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와 비극적 운명을 깨닫도록 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라이오스왕의 살인범을 찾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 왕은, 예언자를 추궁한 끝에 자신이 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며, 더 나아가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이며 라이오스가 자신의 친부일 수 있다는 진실에까지 접근하게 된다. 소포클레스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오이디푸스가 맞닥트리지 않아도 될 진실을 두려움 속에서 집요하게 파헤치도록 함으로써 ‘공포의 실체’에 직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부각하였다.

영화 [할람 포]는, 진실을 파헤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실과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할람은 어머니의 품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퇴행적 욕망과 성인 남성으로 성장하고픈 탈출의 의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스코틀랜드와 에딘버러를 오가는 할람의 시선 에는 이러한 정서불안이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과 대면한 할람은 땅 위에 자신의 두 발을 내딛는다.
...

'할람 포' 역을 맡은 제이미 벨은 '빌리 엘리어트'의소년이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잘 자라주었다'라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상처를 겪었고 어른이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할람의 정서불안과 고통이 제이미 벨의 표정과 종종 오버랩된다. 우리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런 상처를 배우라는 직업과 어떻게든 결합시키려 노력하는 그의 자세에 있을 것이다.
'할람 포'를 보는 동안 낯설게 변한 그의 얼굴에서 빌리 엘리어트에서 보았던 소년의 표정이 언뜻 내비쳐 반가우며 서글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