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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바벨 : 문명인들의 '나약함에 대한 과시'

by 늙은소 2008. 7. 13.

바벨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출연 브래드 피트,케이트 블랑쉐

개봉 2007.02.22 미국,멕시코, 142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대홍수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인류는 시날(바빌로니아)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우고 거대한 탑을 쌓기 시작한다.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또다시 대홍수가 찾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홍수로 벌을 내리지 않겠노라 신은 약속하였으나 인간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바벨탑은 불신의 증거로 기록된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신은 바벨탑을 건설하는 이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다르게 하였고, 이후 이 지역은 ‘혼돈’의 의미를 담아 ‘바벨’, 혹은 ‘바빌론’으로 불리게 된다.

바벨탑을 인류의 언어가 서로 다르게 된 기원으로만 보는 것은 의미를 제한하는 결과가 된다. 바벨탑으로 인해 인류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벨탑을 만드는 것 자체가 소통의 불가능성을 체험한 인간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조차도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서로를 불신하였다.



영화 [바벨]은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서글픈 우화다. 모로코의 사막과 멕시코 국경, 일본의 도시를 오가며, 영화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고통에 대한 교집합적 감성을 카메라에 담는다. 관광지의 이국적 풍경이 테러의 현장으로 돌변하는 순간 마주본 공포에 대해, 16년 간 살아온 나라가 서류상의 문제를 들어 자신을 밀입국자로 몰아버릴 때의 배신감에 대해.


모로코의 사막, 외딴 지역에서 양을 키우며 살아가는 한 집안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아버지는 이웃의 사냥꾼에게 장총과 총알을 구입하고, 이것을 자신의 어린 아들들에게 쏘아보게 한다. 이때 그는 장자인 아흐메드보다 차남인 요세프를 먼저 지목한다. 형보다 영리하고 순발력 있는 요세프와, 그런 그를 경계해야하는 장남 아흐메드의 갈등은 요세프가 친누나와 근친적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며 분열의 조짐을 차곡히 쌓아올린다. 아흐메드와 요세프가 타고난 지위와 능력을 놓고 갈등하며 사격시합을 벌이는 과정은, 엉뚱하게도 관광객인 미국인 부부에게 화를 미치게 되고, 그들이 쏜 총에 맞은 수잔(케이트 블란쳇)은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와 함께 모로코의 촌락에서 응급처치를 받으며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한편 리처드와 수잔의 두 아이를 돌보는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는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이들을 대신 돌봐 줄 사람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결국 사람을 구하지 못한 그녀는 백인 아이들 둘을 차에 태운 채 조카와 함께 고향방문길에 오른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정이 흐르는 그들만의 결혼식은 밤늦은 시간 끝을 맺고, 아멜리아는 아이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던 중 밀입국자 혐의를 받는다. 다시 지구 반대편 일본,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여고생 치에코는 유일하게 자신과 소통하던 대상인 어머니의 자살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다. 치에코는 남자들과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려 하지만, 언어를 필요치 않는 육체적 관계조차 언어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이냐리투 감독은 모로코와 멕시코 국경, 일본 등 4개의 공간을 분주히 오가며, 사소해보이던 갈등이 상호작용 속에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추적한다. 치에코의 아버지인 야스지로(야쿠쇼 코지)가 모로코인에게 건넨 총이 어떻게 아이들 손으로 건너가 수잔의 몸을 관통하였는지, 일정에 차질이 생긴 수잔과 리처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식에 가야 했던 아멜리아는 백인 아이들을 태우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의심을 사고, 결국 미국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에까지 도달한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일본인이 무심코 선의를 표하기 위해 건넨 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인 [21그램]에 비해 [바벨]의 상호관련성은 그 연관관계가 희박한 편이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전쟁, 폭력은 서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정치적 메시지는 (감독의 의도에 반하여) 이 영화에서 오히려 힘을 잃는다.

영화 [바벨]은 미국과 일본, 멕시코와 모로코라는 4개의 국가에 대해, 결코 평등하지 않은 시선을 편향적으로 내보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극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주제로 한 영화인 탓에 [바벨] 속 인물은 해당 국가는 물론, 자신의 세계를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신경질적인 미국인, 삶을 즐기는 멕시코인과 순박한 모로코인처럼, [바벨] 속 인물들은 아무리 그들을 입체화하기 위해 소소한 잔가지를 장식하고 클로즈업을 반복하여도 국가와 민족, 세계의 대표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야스지로의 총이 모로코 사막 한 가운데에 등장한 것은 사건의 시발점이 될 수는 있으나 이것은 부시맨 촌락에 떨어진 콜라병처럼 우연에 가까운 작은 파장에 불과하다. 파멸의 시작을 결정지은 것은 아흐메드와 요세프의 갈등에 있다. 장자로 태어난 자에 대한 요세프의 도전은 친누이를 향한 근친애적 성향과 자위행위의 묘사를 연속해 보여주며 요세프라는 인물에게 원죄를 짊어지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한 미국인 가정을 대표하는 수잔과 리처드,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미국인들조차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여린 피부와 부서질 듯한 금발을 하고 있다. 가장 미국적인 배우가 아니라 미국인들조차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을 미국의 표본으로 제시하는 캐스팅의 부적절성은, 결국 미국인 가정이 파멸을 겪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그 결과 이들의 에피소드는 ‘질서->파괴->질서의 회복’이라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멜로드라마적구도로 고정되고 만다. 다코타 페닝의 여동생인 엘르 페닝이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열사병과 탈수증에 걸린 채 죽어간다는 것을 과연 우리는 용납할 수 있는가. 비슷한 또래인 아흐메드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것과 금발의 소녀가 사막에서 죽어가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백인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우선시하는 불평등의 기호를 접하게 된다.



[바벨]의 요구는 제3세계를 향해서만 열려 있다. 영화는 세계의 질서를 위해 순응해줄 것을 약자인 이들에게 요구한다. 리처드 부부를 돌봐준 모로코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처럼 비문명화에 대한 문명인의 비현실적 동경과 경외심을 복제한다. 돌봐준 사례로 돈을 건네는 리처드의 성의를 끝까지 거부하는 모로코인들을 ‘선’으로 바라보고, 형의 자리를 탐내는 동생 요세프에게 혐의를 드리우며, 미국의 법을 지키지 않은 아멜리아를 추방시키는 그들. 결국 영화는 미국인을 비롯한 선진국의 오만함과 어리석음, 신경증적 피해의식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의 예민하여 상처받기 쉬운 감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만다. 제3세계 국가들을 향해 ‘비문명화’할 것을, 순수함을 유지할 것을 암묵적으로 경고하기에 이른다.

과거 자신들이 자행한 폭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나 해결 없이, 그저 반성할테니 당신들은 참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들. 탐욕을 부릴 만큼 부린 후 스스로에게 질려버린 문명인들이, 지금껏 자신이 수탈해온 민족을 향해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는 꼴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하기엔 당신들의 '가해의 역사'가 너무 길지 않았는가.

오로지 흥행성적만을 위해 제작되는 싸구려 영화에 비한다면야 물론 [바벨]은 매우 높은 영화적 성취감과 완성도, 정치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자꾸만 엄격해지고 싶은 것은, 영화적인 아름다움에 빠져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착각하기 쉬운 감독의, 아직은 짧은 생각이 눈에 밟혀서인 것을 어쩌겠는가.

...

죽음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이들 앞에 내던져진문명인들의 '나약함에 대한 과시'.

사막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며 '냉정해질 것'만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사막'에서 나고 자라난 이들의 뜨거움을, 그 열기에적응할 수 있도록 강인해질 것을 요구하고픈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