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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아일랜드 : 상처 입은 섬들의 이야기

by 늙은소 2004. 9. 21.

아일랜드
채널/시간
출연진 이나영(이중아), 김민준(이재복), 김민정(한시연), 현빈(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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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모두 상처로 굳어진 심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보다 더 오래되었을 화석같은 상처를 짊어지고 그들은 현재를 살아간다. 상처는 굴절된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타인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나를 받아들여 달라, 어루만져 달라며 상처를 내보이지도 못하게 만든다. 상처는 당장의 아픔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들인다. 치유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리하여 자폐적 존재로 스스로를 봉인하는...

'중아'와 '국', '시연'과 '재복'.. 이 네 사람은 깊은 상처를 정신의 일부로 각인시켜가며 살아왔다. '중아'와 '국'은 자신의 상처를 진지함으로 다져갔고, 그 과정에서 내부로 향하는 끝없는 침묵과 고독을 수용해왔다. '시연'과 '재복'은 상처입은 자신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자신과 함께 자신에게 속한 상처까지 값싼 것이 되어버리기 바란다. '중아'와 '국'의 만남, '시연'과 '재복'의 만남은 상처입은 자들이 두터운 벽 안에 누군가를 처음 들여놓을 때 취하는 선택이었다. 비슷한 이들끼리의 만남.. 비슷한 상처와, 상처를 대하는 자세까지 모두 닮은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다음 단계를 필요로 한다. 눈물을 닦아주고, 휘청이는 몸을 바로잡아주던 '국'은, 이제 웃을 준비가 된 '중아'에게 웃음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웃게 만드는, 그리고 힘든 걸음이지만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게 하는 '재복'과의 만남은 그때문에 '중아'에게 중요한 순간이 된다. 이제 네 사람은, 상처를 내보였던 대상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많은 이들이 이와같은 과정을 거쳐 상처를 극복한다. 무덤같은 고독과 고통 속에 침잠하여, 독백 외의 어떤 소리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상처의 처음 단계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상처를 어루만져 줄, 진통제와 같은 손길과 체온을 지닌 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비슷한 형질의 상처입은 이들을 만나 동류의 인간 끼리 가능한 소통을 경험하며, 그들은 자신의 상처로부터 빠져나오는 법을 배운다. 그런 다음 그 손길을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온다. 확연히 드러나는 '나를 닮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상처를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 나의 고통과 고독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그와 나의 관계는 '상처'로 연결된 것이기에.. 그 관계가 상처를 극복하고 망각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렇게 그녀는 그를 떠나고,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한다.

'중아' 머리 속에 집을 짓는다는 '재복'의 존재가 '구원'의 종착지는 아닐 것이다. 상처의 극복은 혼자가 될 수 있을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중아'는 홀로 설 수 없기에 '국'을 필요로 했고, 지금 홀로 웃을 수 없기에 '재복'을 필요로 한다. 그녀처럼 '시연'도, '재복'도 '국'도..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해도.. 크게 안타까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이 목적이며 모든 것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처입은 자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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