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삼만이천칠백육십팔

by 늙은소 2004. 10. 15.

20010914:19:40-강남역

'누나는 나를 플레이보이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그저 한 여자를 3달 이상 만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세 달이면 한 사람을 파악하는데 충분히 긴 시간이죠. 그 기간 동안 여러 방향으로 상대를 시험해봤으나 통과하는 여자가 없었어요.
그들이 미쳐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을 던지고 여러 상황에 놓이게 해봤지만, 그때마다 천편일률적인 답과 행동만 확인했을 뿐이에요. 모두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결국 모두들 뻔한 여자였어요'

녀석은 ‘사람’을 수집하는 유형에 속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온갖 분야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모은 뒤, 공학도답게 효율성을 발휘해 이들을 관리하고자 했는데, 그 수집 대상에 나도 포함되는 모양이다.

연락이 끊어진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누나 나 결혼해요' 라는 말과 함께 녀석은 전화를 걸어왔다.
5년 전, 그리고 처음 알게 된 7년 전에도 나는 녀석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각자 가지고 있던 CD나 LP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판을 교환하자는 말 몇 마디 오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끈질기게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 덕에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녀석의 특성이다. 사람을 수집하고 그들을 분석/분류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재배치하는 것.


20010914:19:45-강남역

'너도 디지털시계의 원리는 잘 알지? 수정 말이야'

'수정의 진동 말인가요? 물론 잘 알죠'

'시간은 분명 아날로그에 속하는 거야.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수정이 전기 자극을 받으면 1초에 32,768번, 즉 2의 15승에 해당하는 수만큼 진동하잖아. 그것을 2로 나누어 16,384를 얻고, 다시 2로 나누어 8192를 얻고, ... 4096, 2048, 1024... 이런 식으로 15번 반복하면 1초라는 시간을 표시할 수 있게 되지. 수정이 한 번 진동하는 데 걸린 시간의 32,768배가 아날로그 공간에서 정의한 1초와 동일하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 아니냐? 본래 1초는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 시간에서 지구 공전 주기를 365.2425로 나눈 값을 더한 다음, 그것을 24로 나누고 다시 60으로 나눈 다음 또 60으로 나눈 것이잖아. 이 두개의 시간 사이에 필연적인 요소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잃어버린 퍼즐의 블록 같은 것 말이야.
왜 우리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것일까? 그리고 왜 한 시간은 60으로 나뉜 거지?'

'누나 내가 답을 말해줄까요? 정답은 아니에요. 그냥 답이죠'

상대를 분석하기 위해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는 그의 말을 들은 지 5분 후, 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미끼가 될 질문을 던졌다. 예기치 않은 질문을 받자 그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답’을 말하겠다 말한다. 독단. 그것은 그의 중요한 본질이었다.

...

'하루가 24시간으로 나뉜 것은 인간의 생체리듬 때문이에요'

나는 녀석이 강조한 ‘답’이라는 단어를 무시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생체리듬은 진화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보는데?
절대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

‘서로 교류가 없던 시대에도 동서양 모두 하루를 12나 24로 나눈 것을 보면 보다 근본적인..즉 24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고 봐야죠’

'어떤 사람들은 24나 12, 혹은 60이 약수가 많기 때문에 시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나누기 쉽다는 말을 하지. 기하학적으로 볼 때, 360을 사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긴 하잖아. 물론 편리함 때문에 12나 24로 하루를 나누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재미있는 발상이라고는 생각해. 적어도 이 질문은 왜 십진법이 전 세계 모든 문명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십진법은 물물교환이나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야. 농사가 시작된 초기 신석기 시대에는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손가락의 개수보다, 하늘의 움직임에 신경 써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바빌로니아 마일이라는 거리 단위에서 근원을 찾는 사람들도 있어요. 바빌로니아 마일이라는 단위가 보통 성인남자가 걸음으로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하루를 꼬박 걸었을 때 12바빌로니아 마일을 간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유로 하루가 12시간이었다는 설명도 있지만 애초에 바빌로니아 마일이라는 거리 단위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쓸만한 해석은 아니죠.'

'역시 일 년이 12달로 나뉜 것과 연관되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구나. 처음에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었는데 사용하기 불편했을 수도 있겠고, 이분법적 사고나 이원론 등의 영향으로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눈 다음 각각 12시간으로 나누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24시간이 된 것일까?‘

...

'누나 정24면체라고 들어봤어요?'

'정다면체라면 정20면체 이상은 나올 수 없다고 증명됐잖아'

'왜 그런지 알아요?'

'정삼각형은 하나의 내각이 60도, 정사각형 90도, 정오각형은 108도인데, 정육각형은 내각이 120도라서 세 개의 면이 한 모서리에서 만났을 때 평면이 되잖아. 면이 두개만 만난다면 서로 포개어지니 입체가 될 수 없지. 결국 정다면체가 될 수 있는 정다각형의 종류는 3개뿐이고, 이들이 만들 수 있는 정다면체는 다섯 가지 뿐이지.

'그렇죠. 하지만 이론상 정24면체가 나올 수 있어요.'

'흠~ 리미트를 적용하는 건가? 왠지 면 하나의 면적이 무한히 커지거나, 반대로 무한히 작아지는 그런 형태의 정다각형이 아닐까 생각되는구나. 어쨌든 24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걸.’


20010914:19:50-강남역

‘정육각형의 방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에 대해 들어봤니?’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죠? 책은 직육면체잖아요. 효율적으로 책을 진열하기 위해서는 90도로 이루어진 공간을 계획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죠.’

‘이 도서관은 무한한 수의 열람실을 갖추고 있고, 또 그만큼의 수에 해당하는 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공간 효율성 따위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 심지어 이 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말이야. 어쨌든 그 덕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열람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서관 이용자들을 위한 수면실이나 기도실 등도 있다던걸. 한 평생 도서관 안에서 생활해도 어떠한 지장이 없도록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곳이라, 그 곳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 죽어서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한은 말이지.
구체(球體)에 근접하지만 구는 아닌, 어쩌면 이 곳도 이론상으로는 정다면체인 입체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도서관에서 자살한 여배우 이야기가 있었어요. 나비라는 이름의 그녀는 같은 책을 236번이나 보았다고 하더군요. 237번째 책을 아직 펼치지도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던데.. 마침내 그녀는 원하던 것을 찾았을까요?’

‘도서관은 죽음과 무관하지 않은 장소야. 매 순간 어느 방에선가 죽음이 발견되지. 열람실의 수는 무한하고 그에 따라 시신이 발견되는 열람실의 수 또한 무한해졌어. 그 여배우가 죽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러나 완벽하게 동시이지는 않는 순간 곳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 이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야.’

‘몇 세기 전 ‘세상의 모든 책에 대한 책’이 있다고 해서 세상을 흥분시켰던 곳이 바로 거기죠?‘

‘그래 맞아. 모두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들떠있었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 세상의 모든 책에 대한 책이 있다는 것은 도서관이 자신의 부분일 수는 있어도 전체가 될 수 없다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였고, 그러한 내용을 증명해낸 책이 발견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줬지. 그 때 여러 열람실에서 죽음이 목격되었어. 밀도의 문제일 뿐, 도서관에서는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 점의 집합처럼 죽음이 연속선을 이루며 진행되고 있지. 오늘 발견된 여배우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야. 죽음의 행렬은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영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순간에도 도서관을 관통하고 있어. 선의 길이와 밀도가 문제될 뿐이야. 여배우의 죽음은 14가지 이유를 필요로 할 수 있으며 동시에(그러나 완벽하게 동시이지는 않은) 196가지 이유를 필요로 할 수도 있어.’

‘그래요. 수정이 32,768번 진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지구가 자전하는 시간에서 공전주기의 365.2425분의 1을 더한 값을 24로 나누고 다시 60, 또 60을 나눈 시간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사실 사람들은 금강석이 1초에 1020번 진동했더라도 거기에 4를 더한 다음 2로 나누는 것을 10번 반복하여 1초를 얻어냈겠죠. 지구의 공전주기가 지금과 다르더라도, 한 달이 일년에 9번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시간 체계가 만들어졌을 거에요. 의미와 상징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숲 속에서 필연의 열매를 발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사람들은 완전하게 해방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녀는 237번째 책을 펼쳐든 순간 그것을 깨달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그녀는 236번째 책을 읽은 후 헤어진 옛 애인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야.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가려던 순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가 만나려 했던 상대가 그날 아침 38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물론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어. 놀란 나머지 헤어드라이어를 욕조에 떨어뜨렸고, 그것을 잡으려다 자신마저도 빠진 게 문제였지. 만취 상태에서 잘못 건 전화 한 통 때문에 자살한 그녀의 옛 애인처럼, 그녀 또한 잘못된 죽음을 맞이한 거야. 어쨌든 기자들은 그녀의 죽음을 옛 연인의 자살과, 그녀가맡은 배역(오필리어)과 연결지었지. 이 또한 놀라운 일은 아니지. 도서관은 무한개의 열람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이 방처럼 말이지. 그나저나 이 도서관에서 어떻게 나가야할 지 모르겠구나’

...................

* 이 글이 처음 작성된 것은 2001년 10월의 일 입니다.

세 번째 파트, '19:50분'에 해당하는 대화편은 2004년 6월 26일 추가된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다른사람의 글에 대한 화답 형식을 취하게 위해 보르헤스의 소설 일부를 차용했습니다.

'비선형적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간마스크  (0) 2005.01.09
2004년 10대 히트상품  (0) 2004.12.29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2) 2004.10.02
아일랜드 : 상처 입은 섬들의 이야기  (0) 2004.09.21
Parry encounters Doctor  (0) 2004.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