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읽기

2012 : 해묵은, 그리고 지독한 농담

by 늙은소 2010. 2. 8.

2012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출연 : 존 쿠삭, 치웨텔 에지오포, 아만다 피트, 텐디 뉴튼
2009년 작, 157분









* 첨부한 이미지는 영화 리뷰를 위한 것으로, 제작사측에 권리가 있습니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대중적이나 고집스럽다. 재앙영화 전문 감독이 되어버린 그의 이력은 종종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자신이 만든 클리셰를 포기하지 않고 매번 적용하는 고집에서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 대반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앙영화는 늘 극단의 두 가지 재료를 버무려 요리한다. 파괴와 생존. 등장인물이 살아남기를 바라면서도 파괴의 장관을 넋 놓고 감상하는 관객들. [2012]에서 에머리히 감독은 후자에 더 큰 비중을 할애할 뿐 아니라, 관객에게 파괴의 장관을 '감상할 것'을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잭슨의 가족들은 탈출의 순간마다 지구멸망의 과정을 리무진 유리창과, 경비행기의 창문, 수송선 앞 유리를 통해-스크린을 바라보듯-감상한다. 종종 이들은 대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창밖을 감상하기도 하는데, 이때 화면이 느려지며 소리는 현실과 괴리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2012]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재앙을 화면을 통해서만 경험한 이들 뿐이다. 순식간에 몰아친 파괴는, 이에 속하였던 모든 인류를 제거하였고 미리 정보를 공유하였던 소수의 인원들은 재앙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전용기로 탈출하여 방주에 오른다. 그 때문에 살아남은 이들은 마치 TV로 중계된 전쟁을 체험하듯 중계된 재앙과 비행기 창문 바깥으로 내려다 본 파괴를 기억할 뿐이다. 10만명을 수용하기로 한 4번 방주를 위험에 빠트리게 한 직접적 원인인 잭슨일가를 향해서, 더불어 또 하나의 원인인 애드리안 햄슬리 박스의 결정에 대하여 살아남은 이들이 비난을 하지 않는 것도, 스크린을 통해 연설을 들었으며, 유압기 수리과정이 생방송으로 중계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개인의 이성적 판단보다, 화면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에 의거해 사고하고 결정하며 행동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살아 방주에 오른다.
(에머리히 감독이 방주를 만든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만 탑승권을 줄 듯 하다)



함께 탈출한 이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끔찍이 챙기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은 그 외의 인물들에 대한 애착이나 그리움, 사라져버린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땅에 파묻힌 이웃과 친구, 부모형제 친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양, 이들에게 가족은 지금 비행기에 탄 5명뿐이다. (나중엔 그마저도 4명으로 압축되지만) 시각효과가 제어하는 몰입도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이 이상한 가족 풍경은 기이하다.

영화의 시작, 인도를 찾은 애드리언 햄슬리(치웨텔 에지오포)는 택시 안에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읽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친구의 아들이 가지고 놀던 배가 물살에 휩쓸려 뒤집히고 만다. 또 다른 주인공인 잭슨 커티스(존 쿠삭)의 첫 등장 신에서는 읽다 만 모비딕의 책 표지와, 일본의 파도그림이 액자로 비춰진다. 영화의 앞부분은 이런 자잘한 예고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말이 다가왔다는 피켓과 집단자살 보도가 화면을 채우며 회개하라는 외침이 TV를 통해 전해지지만, 사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대재앙은 64만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행성의 일렬 배치 때문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장치들은 거리감을 유지한 채 [2012]라를 영화를 감상하게끔 심리적 거리를 조작한다. 영화의 대전제는 신이나 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천체물리학적 결과물로서의 어느 한 순간의 파괴다. 태양계의 생성 과정에서 모든 행성이 일렬로 배치되는 순간은 언젠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다. 그게 마침 2012년 12월일 뿐. 이 영화의 재앙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징벌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러나 영화는 예수상의 파괴를 삽입하고, 미켈란 젤로의 '천지창조'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갈라지는 장면을 애써 집어넣은 뒤, 바티칸 대성당이 파괴되어 그 잔해가 성당 앞에서 기도하던 이들을 덮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잠수함 존 F. 케네디호가 백악관과 미 대통령을 덮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이 지독하고 해묵은, 재치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물을 끼얹는 듯한 농담은 영화의 전제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수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애머리히 감독이 뭔가 생각이 있어 일부러 이러는 것인가 싶어 모든 것을 반대로 뒤집어 보고픈 심정이다.



그런 생각으로 [2012]를 다시 보면, 공포와 절망이 그리 크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왠지 납득이 되기도 한다. 일부러 그리 시켰겠거니. 관객이 인물에게 몰입되지 않도록. 이 모든 것은 농담이며, 구경거리일 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그러고 보면 에머리히의 전작인 [투모로우]에서 제이크 질렌할은 감독의 명령을 어겨가며 지나치게 감정 이입된 연기를 했던 것인지도.

어떤 재앙이 찾아와도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매번 에머리히는 말하지만, 그리 말하면서 인류가 극복할 수 없는 더 큰 재앙과 파괴를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이력이 더 농담처럼 여겨진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