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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Earth (2011) : 그것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다

by 늙은소 2013. 11. 9.

Another Earth (2011)
감독 : 마이크 카힐
출연 : 브릿 말링, 윌리엄 마포더


내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목성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목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름다웠지만, 특별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목성의 대기가 소용돌이치며 움직이고, 숨을 쉬기 시작하자.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다. - Another Earth  

움직이는 목성의 대기에 매료되었던 어린 소녀는 우주로 나아가길 바랐고, 천체물리학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MIT 합격 통지서를 받고 친구들과의 축하파티에서 돌아오던 중, 술에 취한 로다(브릿 말링)에게 흥분한 라디오 DJ가 속보를 전한다.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이 지구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 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해도 바로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DJ의 말에 그녀는 운전 중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로인해 중앙선을 침범하게 된 로다의 차는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던 반대편 차과 부딪히고 존(윌리엄 마포더)의 어린 아들과 임신한 아내가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4년 후 로다는 출소한다.
그 날의 사고를 있게 한 미확인 행성은 지구와 가까워졌으며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나왔다.
생명체가 살고 있음은 물론이며 그 모습이 지구와 완벽하게 똑같다는 정보들.
지구와 같은 모양의 대륙 위로 같은 형태의 도시가 세워져 있으며. 똑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또 하나의 지구가 하늘 위에 떠 있는 풍경.

또 하나의 지구가 머리 위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거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공포와 혼란에만 함몰되어 지내기에 4년은 긴 시간이었고. 사람들은 점차 새로운 지구에 익숙해졌다.
일상을 살아가는 건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간혹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던 로다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4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녀는 인지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맞이한 건 4년 전의 자신이 남겨 놓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자신의 방이었다. 가구 몇 개와 한 장의 천체사진만을 챙겨와 거처를 다락방으로 옮긴 로다는 고등학교 청소부 생활을 시작한다.


로다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앞을 보아야 할 순간에 시선을 위로 향했고. 눈 앞의 차량 대신 먼 곳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 일을 걱정하기 앞서 당장 눈 앞에 일부터 처리하라는 은유로 해석해야 할까?... 모르겠다. 썩 내키지 않는 해석 방향임은 분명하다.
어찌되었든.... 로다가 행한 실수는 자신과 다른 이들의 미래를 파괴하는 결과로 돌아왔다.

로다는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녀의 시선이 또 하나의 지구를 향할 때. 그것은 혼란도 공포도 아니며 호기심도 아닌. 마치 바라봐선 안 될 것을 바라보는 양 애달픔이 묻어난다. 하늘 위의 지구는, 천체물리학자를 꿈꾸었던 그녀에게 학문적 열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그녀의 꿈을 앗아간 사고의 원인이기도 하다.

화장실 벽의 낙서를 지우고 바닥에 떨어진 오물을 치우며. 로다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싶어한다. 낙서를 지우기 위해 벽을 문지르는 손길에서 그녀의 의지가 읽힌다. 그러나 화장실은 다시 낙서로 채워진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워야만 하는 청소부로 생활하던 중.. 자신이 낸 교통사고 피해자인 존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로다. 그녀는 그의 집을 찾아가 그가 어찌 지내는 지 확인하게 되고, 그 날 밤 자살을 시도한다.

예일대 음대 교수이자 유망한 작곡가였던 존(윌리엄 마포더)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 아들과 임신 중이던 아내가 그날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함께, 방치된 채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의 집으로 그는 돌아와 있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할 사람은 로다만이 아니었다. 로다에게 있어 존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현재진행형과 같다.

4년 간의 복역으로 나는 충분히 대가를 치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4년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의식불명 상태로 긴 시간을 보낸 존에게는 사고가 바로 얼마전의 일처럼 생생할 뿐이다. '존' 앞에서 '로다'는 4년 전의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일 뿐이다. 그녀는 이것이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그에게 말을 해야겠다 생각한 로다는 다시 존의 집을 찾아가고, 아무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무료청소 서비스를 하러 왔다 거짓말을 둘러댄다. 집은 존의 절망감을 반영하듯 엉망으로 방치되어 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존의 집을 청소하게 된 계기로 로다는 매주 한 번씩 존의 집을 찾아가 집을 청소하고,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며... 그의 재활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로다의 정체를 모르는 존은 점점 더 그녀에게 의지해 술을 끊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바깥에 나와 산책을 하며.. 다시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존은 서서히 활기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로다가 음주운전 사고를 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의지해 고통을 극복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고 밖에... 애초에 가해자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지나간 사건을 놓고 가정법을 적용한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쌓이고 애정이 커지는 것을 지켜보려니 이런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분히 신파적이다.
로다로 인해 가족을 잃었지만 로다로 인해 다시 생의 의욕을 찾게 된 존처럼
로다에게 있어 하늘 위의 또 다른 지구는 사고를 저지르게 한 원인이며, 죄의식과 고독 속에 방치된 자신을 위로한 유일한 존재였다.

또한 하늘 위의 지구는.... 존과 로다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고독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 지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것.
"어제 뉴스 봤어요?" "우리 머리 위의 또 다른 지구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이런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구에 닥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집주인과 청소부 사이에도 대화라는 걸 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존을 떠나보내고 몇 개월 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로다는 다른 지구에서 온 '로다'를 발견한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외관상 그녀는 4년 전에 음주 운전 교통사고를 내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MIT에 입학해 졸업을 한 전도 유망한 인텔리처럼 보인다.
청소원이 된 이 땅의 로다와, 그렇지 않은 다른 지구의 로다.

존의 집에서 천체망원경을 보며 로다는 물었었다.
"저기서도 나는 청소를 하고 있을까요?"
존은 답한다. "아마도"


더 나은 삶과 바꿀 수 있다면, 혹은 잘못된 과거를 없었던 일로 바꾸고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택할 것인가?
이것은 너무 쉬운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YES를 택하지 않겠는가.

로다는 사고를 내지 않아 다른 삶을 살게 된 다른 지구의 로다와 조우한다.

하지만 왠지 청소원인 로다에게 더 애착이 간다.
그녀는 학교가 아닌 감옥을 다녀왔으며, 그 과정에서 죄책감에 대하여, 책임감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성찰하는 삶을 살아왔다. 존을 도우며 자신이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무엇이 정말로 사죄하는 길인지 끝없이 질문하지만 답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가해자인 로다가 존을 돕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가해자란 이유로 그를 방관하기 보다는, 그에게 욕을 듣든 비난들 듣든. 그를 돕는 길을 택한다.
멈춰있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


목성의 대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거기에서 생명을 느꼈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 날의 어린 소녀처럼 로다는 계속 움직인다.


* 이미지는 영화 리뷰를 위해 작성되었으며,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