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0180303

by 늙은소 2018. 3. 3.

1.

머핀을 구웠다. 결론은

망했다.

딱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어서 식기 전에 얇게 잘라 과자를 만들어 먹고 있는 중이다.

 

베이킹을 자주하지는 않는 편이다.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다. 직접 만들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저렴한 것도 아니고 버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설겆이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쿠키를 굽거나 빵 같은 걸 만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녀 키키나 빨간머리 앤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케이크 만드는 걸 보며 자라다보니 베이킹에 대한 로망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탓도 있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고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닌가. ㅠㅠ 빵 굽는 냄새는 또 얼마나 좋던지...

 

하지만 오늘 머핀을 구운 이유는 새로 산 머핀틀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 실리콘으로 된 주방용품은 처음 사 보는 건데 크고 비싼 제품을 구매하기 전에 머핀 틀 정도로 테스트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0도가 넘는 고온에서 몇 십분간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신소재나 새로운 기술들을 조금 불신하는 편)

결론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금속으로 된 머핀 틀이나 케잌틀보다 오히려 더 좋았는데 머핀이 바로 분리될 뿐 아니라 틀에 묻는 것도 거의 없었다.

(나만 잘하면 된다 나만 ㅠㅠ)

 

베이킹을 하면 늘 느끼는 건데 촉촉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 빵이나 케이크에 비해 쿠키는 오히려 쉽다 '원래 딱딱한 쿠키 만들려고 했던 거야~' 라고 스스로를 속이면 되기 때문이다. 암튼 오늘 만든 머핀도 한 개를 제외하고는 촉촉하고 부드럽게 만들지 못해 결국 과자가 되고 말았다. 폐인은 반죽 보다 시간의 문제가 크지 않았나 싶다. 설명서에 20분간 구우라고 써 있었으나 그보다 짧은17분간 구웠음에도 과자가 되었지 뭔가. 남아 있던 반죽 1개 분량으로 8분간 구워 재시도를 했더니 딱 무난한 머핀이 되어 나왔다. 내가 사용한 머핀틀이 일반적인 머핀보다 크기가 큰 편이고 미리 예열을 하라고 했으나 예열도 하지 않고 구웠기 때문에 20분보다 더 오래 구워야 한다고 생각했더니만... 어쩌란 건지 당췌 알 수가 없다.

 

2.

오래 된 거래처 중 한 곳의 대표님이 박사모 회원에 준하는 분이시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쪽 세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계시니.

일년에 몇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데 그 때마다 나를 붙잡아 놓고 자신의 정치관을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신다.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애초에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는 출신임을 짐작하고 있으시면서도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 듣는 것이 힘은 들지만 이 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어서 나에게 이러시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 그저 묵묵 부답으로 미소만 지은 채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곤 한다.

정 듣기 힘이 들면 자녀분들 이야기나 손자 손녀들 안부를 물어가며 화제를 돌리기도 하고, 또 그렇게 화제를 돌리면 은근히 눈치를 채시는 것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더 고집하지는 않고 당신의 가족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주시니 그게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덕분에 이 분의 청소년기부터 청년기, 대학시절, 연애사,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비롯해 직장 생활과 사업을 하면서 겪은 일들.. 자녀분들의 개인사까지 다 알 정도가 되었고 손자 손녀들 사진도 꽤 많이 보여주셔서 그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까지 알게 되었다.

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들이 놀라곤 한다. 이런 관계를 몇 년 간 유지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칼같이 자르고, 불편한 자리는 피하면서 살아오던 인간이 몇 년 간이나 이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돈이 아쉬워서 버틴 것도 있었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여기 일 외에는 거의 수입이 없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빚도 꽤 지고 세금도 밀려서 계속 고지서는 날아오는데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상황이 몇 년간 계속되었다. 그 때 이 분 회사가 액수는 많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고정 거래처였고, 찾아가서 몇 시간씩 이야기 듣고 오는 게 당장 닥친 문제들을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다 싶어 버틸 수 있었다. 또 이 정도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어디서 이렇게 듣겠나 싶은 부분도 있어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외부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건 역시 다르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이시다보니 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어떻게 하면 좋아하시는지 떠올리며 부모님 대하듯 편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이 분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도 있었다.

 

새로운 거래처가 생겼고, 그 곳과 고정적으로 장기 계약을 하게 되면서 회사도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이 회사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끝낼 수 없는 관계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표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까지는 가서 인사를 드려야 끝날 관계가 된 듯.

생각의 다름보다 나이드시는 모습이 어쩐지 더 신경이 쓰인다.

 

3.

9차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 9차라니... 심지어 비용이 100만원도 하지 않는 일이다. 선금도 없고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만 진행된 참으로 작은 규모의 일인데 이 일이 4개월째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9차 수정 요청이라니. 한 달만에 온 수정요청 메일(8차 수정)을 받고 수정을 해서 보냈더니 하루 만에 9차 수정이 들어온 것이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나 한 소리를 하려다가 다시 한 번 꾹꾹 눌러참고 아예 3가지 버전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처음 일을 의뢰할 때에는 나온 적도 없는 책자용 버전에 영문판까지 만들어달라는데... 이 비용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제는 어디까지 하려나 싶은 마음도 든다.

 

낮에 메일을 받고 한참 화가 났을 때에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일까?'

사실 수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다. 길어야 30분. 그 정도면 충분한데 그냥 하면 될 일을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일까.

 

이 일은 비용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화가 난 것은 맞는데, 다른 경우에도 수정사항이 들어오면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게 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닌데 자꾸만 미룬다거나, 필요 이상 화가 난다거나 하는. 대단한 예술혼을 불어넣은 것도 아니고 자존심이 걸린 일도 아닌데 왜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이렇게 감정적이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9차 수정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0419  (0) 2018.04.22
20180414  (0) 2018.04.14
20180220  (0) 2018.02.21
20180214  (16) 2018.02.15
메모  (14) 2017.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