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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는가

by 늙은소 201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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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다. 누구나 고민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다음 달이면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데, 내년에는 어떻게든 결혼을 해야하지 않을까?"
"내년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지"
"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는 것 같아. 이민이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온갖 고민들에 휩싸여 우울해지기 쉬운 계절

연초에 계획한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일 년을 보냈다는 후회도 하게 되고, 1년 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하나 해낸 게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히다보면. "올해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내가, 내년이라고 뭐 다르게 보내겠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쉬운 법.
조급한 마음에 회사를 그만두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등. 성급한 결정을 내리기도 쉽다.

혹시라도 그런 고민에 빠진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망설이며 만들었던 표를 조금 수정해 여기 올려본다. (이 글이 도움이 될 지 모르겠으나,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연말일수록 이런 게 필요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시작해본다.



가. 지금 나의 단계는? : 사태의 심각성 파악하기

직장인이라면 보통 한 번 이상은 '이놈의 회사 때려치고 만다'는 말을 하게 된다. 
홧김에 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 심각한 상황에서 진지하게 고민하여 사표를 쓰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당신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심각함의 정도를 우선 확인해보자.

사표를 내기 전까지, 심지어 회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하나 있다.
'사실은 도망친 게 아닐까?'

특히 인간관계 갈등이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 이런 불편함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나를 못살게 구는 상사와 한 번 독대를 해보고 그만둬도 그만둘 걸'
'왜 나를 그리 미워하는지 이유라도 한 번 물어볼 걸'
A와 나의 갈등은 '한계 상황'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회복될 여지가 있었음에도 내가 먼저 도망쳐버린 것인가?

1단계 -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 우선 확인해야 할 1단계는 이것이 도피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2단계 - 그 다음 점검할 것은 현재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감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기 쉬우며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2단계 작업(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목록 작성)을 거치는 게 필요하다.
3단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면 세 번째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은 극복 불가능한 '한계'에 대해 점검해보는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된 '나 자신에 대한 한계'는 내가 회사를 옮기더라도 여전히 따라올 가능성이 크다. (대인관계 갈등이 타인이 아닌 나에게 원인이 있다면 회사를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급여나 처우 문제 역시 이직을 통해 연봉을 올릴 수는 있어도 그 한계는 분명 존재하므로 이를 명확히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4단계 - 마지막으로 퇴사를 결정하기 앞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 장기적인 안목에서 삶의 기준이나 목표를 재점검해보는 게 좋다.


 


나. 목록 작성하기


회사를 그만두자 생각한 즉시 사표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참고 또 참다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사표를 쓰기 쉬운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처가 안에서 곪기 쉽다.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방치할 경우 한계 상황이 아닌 것들도 한계로 받아들여지기 쉽고, 사람이 지치면 삶의 목표를 상실하기도 더 쉬운 법.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요소들을 위의 그림처럼 4가지 기준을 세워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 

항목 1-도망치고 싶은 심리 :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지금 이 감정이 일시적인 것인지? 내가 실수했거나 잘못을 저지른 게 있는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려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항목 2-누적된 분노 : 회사든 회사 외적인 곳에서든 지금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록해본다.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회사를 그만 두는 이유가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보는 게 필요하다)
항목 3-한계 상황 : 이곳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한계 상황'은 무엇이 있는가?
항목 4-목표 상실 :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인 만큼 이 참에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 보다 근원적인 부분들까지 점검해보도록 한다.

각각의 항목에 따라 목록을 작성했다면, 이제 항목별 세부 확인에 들어갈 차례다.


 


다. 도망치고 싶은 심리 확인하기


회사를 그만두는 게 '도망치고 싶은 심리'인 게 확인되었다고 해서, '이건 단순 도피심리이니, 크게 신경쓰지 말고 그냥 다니던 회사를 다녀야겠다~'라고 끝내도 될까?
회상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우선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불만이 습관이 되었다고 판단한다면, 내가 왜 습관적으로 불만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서 합리적인 비판과 불만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경우는 당시 일이 매우 많아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다보니 비슷한 처지(야근을 하는)의 다른 팀 직원과 저녁을 먹고 다시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내 업무량이 많았던 이유는 본래 일을 떠맡기 좋아하는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고, 사업 방향을 특정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회사의 계획으로 인해 우리 팀에 일이 몰려서 그런 것도 있었으므로 야근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잘 모르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이들로부터 불필요한 동정을 받을 때가 많았다. (***씨는 왜 그리 미련하게 일을 하냐, ##씨가 ***씨 일 안 도와주냐 등등)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쌓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회사나 팀원, 조직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회사를 나와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필요 이상 회사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퇴사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귀가 얇았음 - -)

특히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그런 분위기를 이용해, 귀가 얇고 잘 휩쓸리는 사람을 방패막이 삼아 눈 밖에 날 의견을 대신 건의하도록 부추긴다거나, 홧김에 회사를 그만두도록 방조한 뒤 정작 자신들은 그만두지도 않고 오래 잘 다니는 걸 보게 되었으니.....

함께 회사 욕을 하고 상사 뒷담화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편은 아니며, 나를 편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적인 사람도 조직에는 많다는 것을 한 번 정도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 사표를 쓰기 전, '내가 사표를 씀으로 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다.




라.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 분노의 원인 찾기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목록을 작성한 다음, 그 목록을 위의 표에 따라 배치해보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배치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배치에 신중을 기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업무량이 많다'는 것도 내가 일을 벌려서 일이 많은 것이라면 '개인의 문제'에 들어가야 하고, 회사나 우리 팀에 문제가 있어서 업무량이 많은 것이라면 그건 '조직의 문제'에 배치해야 한다.


배치가 다 끝났으면, 이제 각각의 영역에서 순위를 정하고 다시 상관관계를 파악해.. 내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

내 경우는 따져보니 [2-1 : 원치 않는 일 or 내 능력 밖의 업무가 주어진다]가 가장 큰 분노 이유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2-1]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일까?
나를 화나게 한 '원치 않는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기피하는 일인데 그걸 내가 떠맡고 있는 거라면, 그건 2-4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싫어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그걸 굳이 나에게 준 누군가가 있거나, 우리 팀이 타 팀에 정치적으로 밀렸다고 볼 수 있으니)
그렇지 않고 다른사람도 다 하는 일인데 나만 특별히 이 일을 싫어한다면 그건 2-2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당시 내 상황은 2-3의 문제로 2-1이 된 경우였다.
업무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고, 내 적성과 안 맞는 것도 아닌데. 의사결정구조가 불합리해서 불필요하게 업무량이 늘어나고, 윗선이 변덕이 심해 밤새 기껏 일을 했더니 다음 날 프로젝트가 없어져버리는 등. 기운빠지는 일의 연속이었던 것.

즉 표면적인 분노는 [2-1]이 문제였으나, 그렇게 된 원인은 [2-3]에 있었다.




마. 한계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도 이해했고, 다소 감정적으로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면??? 여기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한계'를 점검해보는 게 좋다.

죽었다 깨어나도 공부는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억지로 대학을 가지 않는 게 맞는 선택일 수 있고,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고 파단한다면 이민을 가는 게 맞는 답일 수도 있다.
정으로 사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혼을 고려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감수해야 할 한계는 무엇이며, 회사를 옮기더라도 따라다닐 나의 한계는 무엇인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표에 따라 작성해보니 내 경우 [3-1 : 열정 상실]이 가장 큰 한계로 부각되었다. 지칠만큼 지친 상태였던 것.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건의도 해보고... 이것저것 하다 지쳐 나가떨어진 상태라 회사가 지긋지긋했고, 휴직을 하도록 해주겠다, or 팀을 옮기도록 해주겠다는 등 여러 제안을 받았음에도 지친 상태가 심각해 쉽게 수용이 되지 않았다.
[3-1]을 회복하려면 [3-2], [3-3], [3-4]가 어느 정도는 뒷받침이 되어줘야 가능한데.... 그게 여의치 않았던 것.

결정적으로 당시 회사가 경영난을 겪으며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3-4]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자 모든 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3-1]의 한계로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했으나, [3-1]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3-4]에 있었던 것이다.




바.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일까?


회사를 그만두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게 아니었어" 라고.
그렇다면 당신이 바라는 삶은 무엇인가?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가?

[항목 4-목표 상실]이라는 표는 '내가 말하는 삶의 목표라는 게 허황된 꿈이거나, 백일몽 같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냉정해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이 표에서 가장 중요한 박스는 '퇴사 고려'가 아니며, 바로 '답 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하며 이상적인 삶을 자신의 꿈이라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고, 그 삶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나 단점들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삶을 얻기 위해 대신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 그걸 감수할 용기가 있는지.
냉정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부분을 감수하지 못한 채 꿈을 이야기하고, 불만만 늘어놓는다면..
그냥 나는 '한심하게도 답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 있는 대학은 가고 싶은데 당장 공부는 하기 싫다면 그건 그냥 답이 없는 것이다.
가지고 싶은 물건은 있는데 돈은 내기 싫다면, 그것 역시 답이 없는 것.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내가 지금 답이 없는 상태로구나' 다른 사람 눈에 자신이 한심해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다음 단계로 가는 시작일 수 있다.


 



사.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항목 1~4까지를 나란히 놓은 뒤 상관관계를 다시 파악해보았다.
모든 문제들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고리를 따라가다보면 회사를 그만둬야 할 이유도, 혹은 반대로 그만두지 않아야 할 이유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친 뒤 나온 결론은
1 : 너무 오랫동안 화를 참고 일하다보니,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긋난 부분이 발생하였는데 그 골이 깊어져 회복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며
2. 회사에 비전이 없고 사업이 위태로워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몇 개월 뒤 퇴사를 하게 되었다.



아.
돌아보기

이렇게까지 검토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회사를 그만뒀으나, 돌이켜보니 당시의 내 결정이 성급했으며, 감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많았다는 반성을 하게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작업을 거친 뒤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하면서 인생을 낭비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작업은
가장 좋은 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적어도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하며 미련하게 집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더 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 


퇴사를 고민하며 출근하신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에게, 더 나은 내년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