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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괴팍해지다

by 늙은소 2006. 9. 28.

1.

제주도 여행은 좋지 않았다. 멀리 있다고 생각한 태풍이 성급하게 다가온 것도 한 이유지만, 그것은 배경 장치에 더 가까웠다. 여행은 자초한 고립에 가깝다. 그런데 나는 '섬'을 택하였다. 섬으로의 여행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풍이 다가왔다. 섬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상황이 섬을 더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일정이 아직 남아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숨막히게 하였다. 늘 그랬다. 다른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순간에 처했을 때의 공포.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결박당한 자의 심정. 그것이 나를 좀먹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망가질 권리도, 무너질 권리도, 슬프고 괴로울 권리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 삶에는 의사를 묻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기준과 생각에 의해 나의 권리들을 박탈해가는 이들이 등장하곤 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챙겨 간 책 한 권은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하였는데, 가벼울 것이라 생각한 기대와 달리, 책은 과거의 기억을 집요하게 불러오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때문에 내 사랑이 가엾어 지거나, 사랑하였던 그에게 준 상처때문에 후회하는 등의 '과거 지향적' 우울함을 겪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현재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고, 설레여 본 기억이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2년 넘게 나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사람에게 쉽게 반하지는 않는다해도, 사람들의 장점과 매력적인 부분을 제법 잘 찾아내었고..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이 생의 에너지가 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 나는 죽어버린 것일까?

2.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특정한 사건을 겪은 이후, 갑자기 후각이 예민해진다.

겐자부로의 '만년 원년의 풋볼'에는 청각적으로 예민하게 태어난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소란하고 날카로운 소리때문에 자주 괴로워하였고,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던 날이면 방안에 틀어박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앓아눕거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에게도 그러한 예민함이 있다. 아침에 부엌에서 들려오던 금속의 날카로운 소리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였고, 이유없는 분노가 내 안에 차곡히 쌓이기도 하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는 때로 형광등 빛이 방안을 동일한 밀도로 채운 것처럼 '우웅'하는 소리로 모든 곳에서 내 귀의 압력을 조절하였다. 나는 때로 소리에 지배당하여 편안함을 추구할 의지마저 박탈당한 채 괴로움을 잠재워야만 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환풍기에서 나는 소리..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반복적이면서 미묘한 주기를 숨긴 채 뇌를 서서히 조여오는 소리들. 창문 밖에서는 한데 뒤섞인 먼지처럼 소란스러움이 예측하지 못한 순서로 집안을 침투해오곤 하였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잡음 뿐만 아니라, '어휘'와 '톤'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독특한 언어습관이 있기 마련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에..'를 문장이 시작하기 전에 넣어야만 하는가 하면, '그리고'와 '그런데'와 '그래서'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고 모조리 '근데'로 줄여 말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천천히 이끌어내지 못하는 성급함으로 인해 속을 훤히 내보인이는, 사람들이 지루해할까봐 초조해하며 궁색한 모습으로 뒷말을 이끌곤 한다. 또한 어떤 이는 '사실은', '정말'을 수도 없이 문장에 집어넣어 자신의 말에 대단한 진실이라도 있는 양 포장하지만, 듣는 이는 그 때문에 오히려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는 것이란 말이다'라든가, '..해 버렸던 것이거든'과 같은 불필요한 장식들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과 때론 분노까지 치민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분명히'를 계속 '분명시'로 발음할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정신은 온통 왜 '히'를 '시'로 발음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게 된다. '장난 아니다'라는 말을 너무 자주 쓰는 사람은 속되게 느껴지고, '..해버렸던 것이다', '..란 말이다'를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면 유치해보인다. 가끔 개그맨들이 하는 유행어를 사용할 수는 있으나, 그 말투를 온전히 따라하여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교가 지나면 버려야 할 안좋은 습관이다. 그것은 몇몇 어휘나 특정한 표현들만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유행어를 선도하는 개그맨이라도 되는 양, 독특한 억양이나 톤을 반복하여 몇 개월에서 몇년씩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역시 신경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문장이 '내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들도 있고, 문법에도 맞지 않게 '의외로'가 문장 4개 중 3개에 모두 들어가는 경우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대화 도중 내가 이야기한 것을 두고 늘 '그건 말이지'로 시작하며 마치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암시를 주며 대화를 진행하여 상대를 짜증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혹은 문장의 시작을 '문제는..' 으로 하여 자신이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위를 환기시키고 자신에게 주목시키려고 애쓰는 유형도 있다.

나는 그의 말을 아예 듣지 않고, 이후로는 그의 말에 들어가는 이 오염물들을 찾아내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리고 왜 그는 이러한 말을 사용하는지, 어떠한 거짓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을 수 없이 집어넣는지 추측하기 시작한다. 피곤한 일이다.

3.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다. 악보만 따로 정리한 책장의 한 칸에서 상당히 오래 된 '피아노명곡집1'을 찾아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산 악보이니.. 26년 전에 산 것이다. [피아노명곡집1]에 수록된 곡 목록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펼쳐든 악보였다. 책을 펼치니 '소녀의 기도'라든가 '은파', '워털루전쟁'과 같은 곡들이 보인다. 반가움과 허탈함이 겹쳐진 웃음이 순간 떠오른다. 그런데 곡을 직접 연주해보니, 이 곡들의 유치함에 웃음이 나온다. (대체 언제부터 타인의 작품을 비웃기까지 하는 오만함이 생긴 것일까?) 작곡을 해본 적은 없지만, 작곡에 어떤 단계나 난이도가 있다면 이 곡들은 하단에 위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털루전쟁'이라는 곡은 이 곡을 처음 연주하였던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다. 대포를 쏘는 부분에서는 실제 대포를 터트리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저음의 건반을 세게 두드린다. 나팔을 부는 장면은 나팔음을 밝고 경쾌하게 연주한다. 피아노는 전쟁의 매 순간을 순서에 맞게 흉내낸다. '뻐꾹왈츠'가 뻐꾸기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랑의 기쁨'은 기쁘기만 한 노래여야하고, '슬픈 도나우'가 처량맞은 트롯트풍을 고집하듯이.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깊이가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의 움직임에도 어려움이 없고 의외성이 발견되지 않아 금새 지루해진다. 음악 뿐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 등 모든 분야에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 처음 포토샵을 익혔을 때 누구나 빠져들었던 필터의 과도한 사용들.. 틀에 박힌 구도와 지나치게 안정된 무게감으로 사진을 찍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취향이 권력화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향에는 역시 단계가 있으며.. 난이도나 깊이같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시작하여 결국 거기서 멈춰버린 클래식 취향의 남자와 1시간 동안 음악이야기를 해야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홀로서기'가 여전히 아름다운 시라고, '시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을 십계명이라도 되는 양 무비판적으로 읊조리는 낭만주의자가 함께 문학을 이야기하자고 한다면!!!

나 역시 그런 이들에 속하였고, 일부의 취향은 여전히 그들에 속해있다. 머리로는 이해되어도 답답한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화들을 피하기도 하며, 나의 이해력과 분석의 깊이는 원하는 곳에 다다르지 못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1년 사이 타인의 취향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상당히 편협해짐을 느낀다. 상대방의 책장에 꽂힌 책의 목록으로 무언가를 판가름하려 들고, 영화나 책, 음악에 대한 상대의 평가가 기대이하이면 그 사람 자체까지도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아예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편협함과 괴팍함의 갑주를 두르게 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