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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갑을 고시원 체류기

by 늙은소 2006. 11. 7.

박민규가 체류한 곳은 '갑을 고시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경험한 3개의 고시원 중 단 한 곳도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 더구나 첫 번째 고시원은 어느 지역에 있는 것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으니 예전 생각이 흘러흘러 차고 넘친다. 참 잘도 잊고 살았구나 싶다. 단편적인 몇 개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똑바로 누워 잠들기 힘든 좁은 공간과, 굶주림과 함께 잠이 드는 두 번째 고시원, 세 번째 고시원에서의 외로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으니 그 기억이 정교해지고, 헐거워진 조직을 다시 치밀하게 하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한다.


...


1997년과 1998년 사이


처음 고시원에 찾아갔을 때의 기억은 섬세하지 못하다. 그 때 나는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내릴 만큼 이성적이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그러하겠지만 고시원도 눈여겨 찾지 않으면 그들이 얼마나 주변에 널려있는지 모르게 된다. 그러나 막상 고시원을 찾아다니니 그곳에도 다양한 가격과 옵션이 있으며 수준의 차이라는 게 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 고시원은 건물의 3층에서 시작한다. 1층과 2층은 여러 잡다한 가게로 세를 주고, 잘 나가지 않는 3층부터 4층, 5층까지 고시원이 들어서는 구조이다. 고시원 입구는 독서실과 흡사하다. 차가운 시멘트 계단은 어둡고 좁았으며, 밤이면 굳게 잠기는 철문을 통과해야만 3층 사무실에 들어설 수 있다. 비교적 저렴하다는 고시원의 방 가격은 당시 월 17만원 선이었다. 나는 한 달치를 선불로 계산하였다.


연한 살색 합판들로 이루어진 칸막이와 문은 소리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켰다. 좁은 복도는 독서실과 비슷하여 큰 거부감은 없었지만 좌우의 방들에서 나는 작은 소음은 제법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들려오는 소리의 크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자칫 소음을 발산하여 얼굴조차 모르는 옆방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기침이 나오거나 의자에서 잠시 기지개를 켤 때, 이 소리가 나에게만 들리는 것인지 다른 이에게도 들릴 만큼 정말로 큰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나치게 조용한 공간은 오히려 모든 소리를 크게 하였고,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기는커녕, 모든 소리의 크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햇빛이 드는 방은 비쌌으므로 나는 빛이 들지 않는 방을 택하였다. 형광등은 살색의 합판에 흡수되어 더욱 방을 음침하게 하였고, 한 달 뒤 결국 고시원을 옮기기로 하였다.


두 번째 고시원은 햇빛이 들었지만 대신 공간이 그 반이었다. 처음의 고시원은 책상과 잠을 잘 수 있는 간이침대를 놓고도 방 안에서 서너 걸음 서성일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방은 퀸 사이즈 침대보다도 작아 두 팔을 벌려 누우면 양 손이 벽에 닿았고, 발을 책상 아래에 집어넣어야 잠들 수 있었다. 공부를 할 때 사용한 의자는 잠잘 때 책상 위에 뒤집어서 올려놓아야 한다. 책상 아래 다리를 집어넣고 잠들 때마다 그 의자가 갑자기 책상 아래로 떨어지면 어찌하나 그것이 늘 불안하였다.


햇빛이 있다는 것과 벽이 조금은 두꺼워 소음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건물이 신축이어서 화장실이 깨끗하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홍대 앞에서 화실을 다니고 있던 때라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고시원에서 생활하였다. 홍대 주변은 대학생들보다 오히려 미대 입시를 위한 학원과 재수생들로 넘쳐났다. 아직 고등학생인 아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바로 화실에 왔고, 재수생들은 화실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그림을 그렸다. 화실은 4시간을 한 타임으로 하였다. 미대 실기가 3시간에서 4시간 사이에 치뤄지는 까닭이다. 평상시에는 7시에서 11시까지 한 타임 듣고 방학기간에는 2시에서 6시를 추가하여 두 타임을 듣는다. 그리고 수능이 끝난 다음날부터는 3타임을 들으며 하루 14시간 학원에서 그림을 그린다.


많은 재수생들이 학원 근처 고시원에서 입시학원과 화실을 오가며 대입을 준비했다. 내 경우는 입시학원까지 다닐 경제력은 없어 고시원에서 홀로 수능공부를 하고 화실만을 오갔다. 그 때문에 낮에는 고시원에 혼자 남아있을 때가 많았다. 홀로 남게 되었을 때의 조용함은 고시원이기 때문에 조용해야하는 침묵과는 확연히 다른 침묵이었다. 칸칸마다 사람이 있다고 생각될 때와는 다른 조용함이 가끔은 더 힘이 들었다. 그럴때면홍대 근처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거나, 일대를 몇 바퀴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명색이 고시원이었지만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은 그 곳에서도 친구를 사귀었다. 이 방 저 방 두런두런 떠드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수능점수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인 아이들은 고시원을 공부하기 위한 장소보다 잠자기 위해 사용하였다. 덕분에 다른 이들의 소음이 있긴 했어도 내가 시끄럽게 할 지 모른다는 압박감은 덜하였다.


그곳에서 반년을 보낸 다음 목표하였던 대학에 합격한 나는 다시는 고시원에서 생활하지 않으리라 가볍게 단언하였다.

그러나 삶이 어디 예상한 것처럼 되었던가.


대학은 너무 멀었다


망우동에서 신림동은 너무 멀었다. 7호선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고, 망우동에서 학교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차를 3번 타도 2시간 반이 걸렸다. 567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건대역이 나왔다. 거기서 2호선을 탄 다음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다시 마을버스를 타면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한창 지하철 공사 중인 면목동 2차로를 지나가는 567번 버스는 한 시간 반이 되어도 건대입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경원대로 가는 버스를 타면 천호동을 지나 잠실로 가는데 여기서 내려 2호선을 탄 다음 서울대입구역까지 가는 방법도 있었다. 크게 돌아가는 버스이기는 해도 길이 덜 막히기 때문에 안정적이었다.그러나 차멀미가 심한 편이어서 잠실까지가는 도중 중간에 내려 길에 토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대학에 들어가면 많은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입시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하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워낙 짧은 경력(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때문에 학원 강사자리를 맡기가 쉽지 않았다. 과외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IMF 여파로 과외를 받겠다는 사람이 크게 줄었고, 과외를 해야 하는 학생은 늘어나 경쟁이 치열하였다. 주변에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시엔 그럴 주변이 없었다.


학교에 아르바이트 신청을 하여 간신히 과외 하나를 맡게 되었다. 당시 주 2회, 2시간씩 하여 월 30만원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과외비였음에도, 3시간을 해주겠다고 하여서야 겨우 그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일원동이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다음 셔틀버스를 타고 나가 2호선을 타고, 다시 3호선을 갈아타고 일원동에 도착하여 3시간 과외를 하면 10시가 되었다. 3호선을 타고 옥수역까지 온 다음 회기까지 연결된 국철로 갈아타야했다. 20분을 기다려 국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내린 다음 10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12시였다. 장학금을 타야하는데, 학부제로 개편되며 4시간짜리 전공 실기만 4개를 들어야했다. 4시간이어도 학점은 2학점뿐이다. 19학점을 신청했고 수업시간은 주 30시간에 가까웠다.


결국 신림동에서 고시원을 찾아 돌아다녔다. 과외가 없는 날에도 하루에 차를 6번 타는데, 그 교통비가 만만치 않으니 그 돈이면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것도 가능할 듯 했다. 오가는 시간을 버니 그 시간동안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싼 방


녹두거리 입구에는 가로로 넓은 5층 높이 건물들이 벽을 이루며 도로를 따라 서 있었다. 그 중 두 개가 3층부터 고시원이기에 우선 이곳을 찾아갔다. 밖에서 본 것보다 안은 더 낡았다. 1층과 지하가 술집인 건물이어서 공용 화장실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겼다. 냄새에 무신경해지려 애쓰며 고시원 사무실에 들어가 가장 싼 방이 얼마인가 물어보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사무실에서 '가장 싼 방'을 물어봤을까. 가장 싼 방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부끄러움이 있지 않을까. 방의 가격이 보통 얼마나 하는지 물어보다가 은근슬쩍 가장 싼 방의 가격을 살펴보아도 될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내 상황이 측은하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9만원 짜리 방이 있다 말하였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9만원이라는 것일까. 방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열쇠를 꺼내들고 따라오게 하였다. 좁고 어두운 복도의 맨 끝에서 방문이 열렸다. 구조가 이상한 방이었다. 책상이 하나 있고 의자 바로 뒤에 시멘트로 만든 간이침대가 보이는데, 그 위의 공간이 막혀있었다. 잠자는 공간 위쪽은 사용할 일이 없으니 그곳을 다른 방의 잠자는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즉 방 하나는 'ㄴ' 자로, 다른 방 하나는 'ㄱ'자로 만들어 나눈 것인데, 2층 침대의 아래만 있고 그 위가 시멘트로 덮인 형태였다. 하나여도 좁을 방을 이렇게 두 개로 나누어 9만원을 받고 있다니. 이보다 싼 방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화장실과 세면실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올라오는 길에 공용화장실을 못 보았냐며, 그곳 중 한 칸은 화장실이며, 다른 한 칸은 샤워장이라 한다.


다시 화장실을 가보았다. 냄새는 여전했다. 샤워실이라는 곳은 화장실 한 칸을 개조한 것으로, 변기를 없앤 공간에 작은 세숫대야 하나가 놓여있었다. 바가지는 자주 분실하여 각자 개인 것을 들고와 샤워를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남녀 공용이었다. 9만원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이곳에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결국 길 건너 고시원에서 17만원 하는 방을 계약하였다. 역시 창문이 없는 곳으로 공용 세탁실 문 앞에 있는 방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불을 끄면 칠흙처럼 어두웠고, 고시원답게 내부는 조용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밤 12시면 3층 계단의 철문을 잠그기 때문에 바깥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답답하면 옥상에 올라가 마치 방 안에서는 숨조차 쉬지 않았던 것처럼 공기를 들이마셨다.


잠들지 않는 밤이면 옥상에 올라가 길 건너 9만원짜리 방을 바라보았다. 아직 신학기라 9만원짜리 방 아래의 술집에서는 신입생들을 쏟아냈다. 그들의 입에서는 억지로 마신 술이 쏟아져 나왔고, 학생운동의 기억이 남아있는 선배들에게 배운 익숙하지 않은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 몸에 맞지 않아 나온 구토물이었다. 이미 시대는 변하였다. 그것은 마지막 구토가 될 것이었다. 나는 고시원 옥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미 여러 달을 이곳에서 보내었을 고시생들은 두세 명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외로웠다. 좁은 공간을 함께 나누어 살고 있는 그들과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지, 미칠 것처럼 공부를 하여 대학에 왔는데, 대체 왜 그렇게 여기에 오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삶은 여전히 힘겹고 하루의 끼니조차 해결하는 것이 막막했다. 길건너 건물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9만원짜리 방은 불 꺼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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