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하거나, 힘겨운 삶이 내세울 일은 아니다. 자랑스럽게 떠들 일도 아니지만 일부러 감추거나 거짓말 할 것도 아니다. 다른 이들에겐 지극히 당연하여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하였을 경험이, 결여로 인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낯선 자극과 소소한 경험들에도 많은 의미가 부여되고, 복잡하게 연결된 다양한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이 모두 뒤틀려 제대로 닫히지 않는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이라든가, 자동으로 물을 급수하지 못하는 세탁기로 빨래하는 요령처럼..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는 벽 사이의 정서... 목욕탕 타일 위에 담요를 깔고 잘 때의 느낌은 또 어찌나 남다른지..
빈곤한 경험을 한 것이지, 내 경험이 빈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의 주위 반응이 재미있다. 보통은 자리 봐 가며 말을 하기 때문에 친하지 않은 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진 않는다. 그럼에도 한 두 명씩 편하지 않은 이들이 섞여 있거나, 제법 가깝다 생각하여 말을 하였는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반응은 '나도 그랬다'이다. 알콜 중독자 단체치료 모임도 아닌데, 손들고 일어서서 자기고백의 시간을 가지려는 사람마냥 자신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읊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부모님이 사업을 하다 망하여 도망다닌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에 이렇게나 사업가가 많았는지, 그리고 그 사업가들은 왜 그리 잘도 망하는지.. 내 주변은 사업이 망하여 도망다닌 사람들 천지이다. 그러기라도 해 봤으면 적어도 잠시동안은 잘 살았을 것 아냐.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겉으로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과거를 말하고 싶던 것도, 그들의 과거를 캐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독특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도배지로 뒤덮인 방안 풍경과 달리, 온통 타일로 된 목욕탕에서 잠들 때의 느낌. 그것이 가난해서라기보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설레이기까지 했다. 타일로 장식된 침실은 어떻겠냐며 다음 주제를 위해 그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왜 다들 감상에 젖어 저리 동정어린 표정을 짓고 있느냔 말이다.
타인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여 당황한다. 그리고는 '너만 힘든게 아니다'를 주장하기 위해 '나도 힘들었다', 혹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너보다 더 힘들다더라'와 같은 상투적인 반응을 내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조금 나은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죄의식의 작용이기 쉽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신이 좀 더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언제 밥이나 한 번 사지? 라고 생각할 뿐. (그런데 이 사람들. 생각보다 밥 사는데 인색하다.) 큰 부족함 없이 잘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밝음이 있다. 함께 있으면 나도 가벼워지는 그런 따스함.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과 함께 하려하고 그들의 그런 부분을 아끼는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우울함과 자신에게 없는 결핍을 애써 찾아내 그것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타인의 고난 앞에 자신의 어려움을 쥐어짜 이를 증명하려 안달하는 것인가.
2. 낯선 부류가 등장했다. '나도 힘들었어요' 류가 아닌, '난 잘 살았는데'파.
돈이 없어 굶던 이야기를 하자, '자취할 때에도 한달에 200만원은 벌어서 집에서 애들 불러다 파티를 하였다' 로 답이 돌아온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이 듣고 싶었지만 오디오가 없어 듣지도 못하는 LP를 사놓고 구경만했다는이야기를 하자, 고등학교 때에도 아르바이트를 하여 원 없이 판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모님이 가게를 하셔서 제대로 된 음식을 잘 못먹었다는 말을 꺼내면 자신은 작은 아버지가 원양어업쪽에 계셔서 참치를 통째회로 먹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책 한권 가지고 싶어 용돈을 모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자신은 동아 원색 대백과사전과 과학동아를 즐겨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떡하라고? 앙? - -+ )
대체 머리 속이 어떤 구조로 된 것인지..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 이 부류는 사람이 어떻게 가난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에 돈 벌수 있는 길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이상한건가?' 문장은 늘 이렇게 끝난다. '내가 이상한건가?'그래 너 이상하다. 아니, '그래 너 잘났다.'
이 부류에게 사는 집을 보여주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나 여기서 지금껏 살고 있거든?'
'너희 부모님이 너 이러고 사시는거 아시냐?'
->'우리 부모님 집도 마찬가지거든?'
만약 1번 부류였다면 사는 집을 보여주었을 때 약간 미안해하며.. '그래도 괜찮네.. 우리 집도 뭐가 안좋고, 뭐가 문제고...' 등등 떠들기 시작할 것이다.
...
참다 못해 어느날 아예 인연 끊자 싶어 조목조목 따져 물으니 자신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한다. 네가 옛날 이야기를 하기에, 나도 옛날 이야기를 한 것 뿐이다. 네가 자취할 때 뭘 먹었는지 이야기를 하니, 나도 자취할 때 밥 해먹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뭐가 잘못된 것이냐. 이게 대화가 아니냐는 것이다. - -;; 그런가? 이게 대화인가? 그런데 왜 난 너에게 짜증이나지? 1번 부류와 2번 부류 중 뭐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3. 내가 좋아하는건 3번이다. 이들은 '맞아.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런건 재미있지 않았냐?'라고 되물어온다.
신세한탄 하자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고백 시간을 갖자는 것도 아니었기에.. 과거로부터 흥미로움들을 뽑아내고, 그 안에서 즐거운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건 이들이다. 그런데 왜 이리 드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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