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하얀거탑 - 이제야 현실이 된 드라마

by 늙은소 2007. 1. 11.

드라마의 인물이 평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적 속성에 그 원인이있지는 않을까?

한 인물이 입체성을 띄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가 내면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부로부터의 갈등을 표면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행동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일이고, 미세한 표정의 차이를 내기에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독백이다.

각 인물이 스스로 자신의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백이나 나레이션이 많이 들어가는 드라마가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기 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정옥'이나 '노희경'의 드라마가 여기 해당한다.


그 다음으로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 스스로 자신의 입체성을 타인에게 밝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인물들 간의 친밀도가 높아야 이러한 행위가 가능한데,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 줄 친구나 가족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다.

보통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인의 경우 독백은 '사악한 전략을 꾸밀 때' 사용되며, 자신의 속내를 터놓는 경우는 친구나 가족이 아닌 아랫사람에게 향한다. (빌리박과 공실장, 대소왕자와 나로의 관계를 보라!)

입체적인 악인, 설득력 있는 악인을 그려낸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작업이다. 고작해야 악인이 회개하여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도거나,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며 폭로하듯 스스로를 변명하는 제스처를 취할 뿐이다.

...


지난 주말부터 시작한 '하얀거탑'을 매우 즐겁게 시청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2회가 진행되었을 뿐이지만성격의 미세한 표면이 드러나고, 그 차이들이 서로 충돌하며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진행이 조금 빠른 감이 없지 않지만, 결국 이들은 이기적인 발상에서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다가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갈등관계로 서서히 침잠하게 된다.


3회 예고편에서 장준혁의 장인은 '이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라 이야기한다.
전쟁은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악인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지만 장준혁과 이주완, 우용길은 극 초반부터 철저한 악인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각자의 파벌이 뒤엉키며 물러설 수 없는 대립관계를 이루면서 서서히 '전쟁'의 참화 속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게 된 것이다.


장준혁이 조금 더 비열하거나, 조금 더 비굴하였다면 이 드라마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덜 영악했고, 덜 비굴했기에 덫에 빠진다.


각 인물을 분석해보자.

우용길 :

그는 물질에 집착하나, 일이 번거롭게 진행되어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기피하는 인물이다.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다거나 모험을 하지 않으며 큰 것을 위해 작은것을 희생할 바에는, 일체의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안전로를 택하는 유형이다. 위험한 뒷거래보다는 철저하게 돈세탁을 할 수 있는 업체를 선호하며, 알아서 뒷마무리까지 해주는 아랫사람을 선호하는 유형이다.
이주완이 장준혁을 내치는 데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 우용길이 이를 못들은 척 한 것은 정작 본인도 장준혁에게 화는 났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적대적인 상대를 만들지도 않지만, 자기편도 만들지 못한다.


이주완 :

그는 물질 보다는 명예에 더 집착하는 유형이다. 흥분을 잘 하며, 속마음을 잘 감추지 못하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응대하는 상대보다는 두루뭉술한 성격과 더 잘 어울린다. 그가 장준혁을 신임하였을 때에는 그의 실력이 자신의 능력과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의 명예와 능력을 위해서만 그를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임, 즉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자로 장준혁을 놓고 보자, 그와 자신을 동등하게 비교하게 되었고 그의 젊음과 능력, 자기과신 등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평하게 된다. 아마도 이주완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남에게 휘둘리거나 소심하며 자신의 능력에 회의적이기 쉬운 성격이리라 짐작된다. (의사집안이라든가 부인의 성격 등으로 보아서도)
그가 직접 자기 손으로 장준혁을 내치지 못하는 것은 공공연한 적을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원칙을 스스로 깨서 명예에 일말의 오점이라도 남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사람들의 뒷말에 신경쓰는 성격)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쉽게 흥분하고 삐지기 쉬운 성격이기에 소소한 적들을 만들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인맥'이나 '연'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를 생성하게 된다.


장준혁 :

장준혁이 애초에 자신의 장인쪽 인맥을 들먹이며 이주완에게 다소 비굴하게 굽신거렸다면 이들이 지금과 같은 갈등관계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술에 있어 천재적일 지는 모르지만 인간 군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경험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결함은 그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현재까지의 작은 전투에서 그가 완패한 이유는 자신의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거기에 맞는 무기를 고르지 못하였으며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


문제는 장준혁이 제대로 된 무기를 고르지 못하는 동안 귀차니즘의 우용길과 자존심대왕 이주완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우용길과 이주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즉 장준혁이 그들 생각보다 더 큰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가난한 나라라며 업수이여긴 북한이 알보고니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더라는 스토리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작게 끝날 수 있는 싸움이 큰 전쟁이 된 데에는 장준혁이 자신의 무기를 상대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에도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싸움은 전쟁이 되고, 이주완은 용병을 고용하게 된다.(자기 손에 피 묻히는 걸 싫어하는 이주완이라면 용병을 쓰는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한 결과이다.

어쩌면 모두가 희생을 각오해야할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병원 뿐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점이다.

소소한실수가 반복되며 누군가는 승진에서 누락되고, 전임강사 자리에서 탈락한다. 어디든 자존심만 쎈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아랫사람 부려먹기 좋아하는 상사들도 있는 법이다. 아부로만 일관하는 아랫사람도 있고, 몸 바쳐 충성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궁합이고, 적절한 타이밍과 요령인데.. 우리는 늘 그것이 어긋나며 관계에 틈을 만들고야 만다.


이 드라마에 기대감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면서도 미세하게 포착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한 현실 속에서도 정의로움이 살아숨쉴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현실에 적당히 적응한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하기까지 한 인물. 최도영이 과연 얼마나 정의를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