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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하얀거탑] - 괄목상대에 대하여 생각하다

by 늙은소 2007. 1. 24.

드라마 뿐 아니라, 영화나 소설에 있어서도 작품을 읽는 방법과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감독과 작가의 주제의식을 문제 삼아 그들의 사상과 주장하는 바를 논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작품에 반영된 시대상을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찾는 것도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는 감독론, 작가론처럼 타인을 분석하고 그를 특징지우는 방법으로 작품과 일정 거리를 둔다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작품 속의 인물과 사건을 보편화함으로써 인간 전체, 혹은 사회의 단면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모든 작품들은 완벽한 이분법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와 전혀 다를 것 같은 개인에게도 유사성은 있는 법이고, 누구에게나 통용될 것만 같은 보편성에 끝내 부합하지 못하는 개인들도 있는 법이니..


하얀거탑을 보며, 처음 무척 흥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고도의 두뇌싸움이 펼쳐지리라 내심 기대하였다. 그러나 3회 4회가 진행되며 나의 기대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대강자일 줄로만 알았던 우용길도, 제법 머리를 잘 굴리겠거니 기대하였던 장준혁도, 뒷심을 보이며 큰 수를 둘 줄 알았던 이주완도.. 모두 가벼운 걸음만 내보일 뿐 누구하나 전략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난 하얀거탑을 열심히 시청한다. 단 이제는 조금 다른 기준으로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 뿐이다.

...


나는 장준혁을 지지한다. 아니, 장준혁에게서 내 모습을 바라본다.

그에게서 나와 닮은 부분을 발견하기에, 그를 향한 애착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내비치는 중이다.

지난 번 글에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장준혁이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명확히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주완 측이 장준혁을 너무 얕보았음을 지적하였었다. 드라마에서 전개된 것처럼 장준혁의 배경 역시 상당한 파워임이 이미 입증이 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주완과 우용길은 극 초반에 그를 얕보았던 것일까?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에? 아니다. 그들은 장준혁을 그다지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대로. 풋내기 인턴으로, 시키는대로 구르던 레지던트 장준혁으로 내내 보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성장(내공과 뒷배경과 같은)을 눈여겨 보지 않았고, 은근히 무시해도 될 것이라 치부한 것이다. - 소위 '윗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경우가 많다. 그들을 능가할 만큼 성장한 것은 아니어도, 내가 동시에 출발한 이들을 이미 재치고 한참 앞서 달리고 있는데도 그 차이를 눈여겨 봐주지 않고 '동류'로 취급해버리거나 싸잡아서 이야기하는 경우.. 사회생활 하며 다들 겪어보지 않았는가. 그래서 장준혁을 지지하게 되는 것 같다.

...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눈을 씻고 다시 상대방을 본다는 의미이다. 모르던 사이 상대방의 능력이 달라질 수 있으니 늘 상대를 대할 때 새로운 눈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는 말로 사용된다. 사람은 노력여하에 따라, 또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그 위치와 생각, 가치관이 변할 수 있다. 예전에 내 아랫사람이었다고 해서 늘 그가 나보다 못하지도 않으며, 철없이 방황을 일삼던 친구가 오히려 지금의 나보다 더 올곧은 생각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있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올바른 일이나, 타인의 과거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그의 현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결코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이주완을 비롯한 보수적인 인물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 하나는 바로 ‘괄목상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일단 판단하게 되면, 그 위치를 고정시켜버리는 습성이 있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이에게 바로 반말을 한다거나, ‘내가 의사이니..’, ‘내가 교수이니..’, ‘우리 집안이 어떠니..’, ‘내 나이가 몇이니’를 들어 우선 자신의 위치를 고정한 다음, 거기에 따라 타인을 아래에 두는 것이다.

반면 장준혁은 자신의 야망에 순응하며 부와 지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 주력해온 인물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계단을 건너뛰며 앞서가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과속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보다 뒤쳐진 조건에서 시작했다는 열등감은 그의 과속을 부채질한다. 마치 마라톤에서 한 명 한 명 재치며 순위를 갈아치우듯, 그는 자신의 성공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성공(실력은 인정하지만 사회적 지위와 세력을 얕본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여기에 일차적인 갈등이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글 중 ‘박찬욱’ 감독에 대한 글이 있다. (정성일 공든탑으로 검색해보길) 박찬욱감독이 JSA로 큰 성공을 거둔 직후 우연히 그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평소 성공한 직후의 지인은 만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그를 피하고 싶었다는 내용이다. 성공한 이를 피하려 한 이유는 그를 질투할까봐서가 아니라, 실패보다는 성공이 오히려 인간을 더 변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정성일 씨는 말한다. (박감독도 그러지 않나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였다고 함)

사실 그렇다. 장준혁처럼 앞을 향해 달려가는 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달려왔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든다. 그는 한때 자신을 무시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보여주려 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을 괄목상대해달라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장준혁을 평가하기 위해 시스템을 업데이트 해야만 한다. 잠깐 못본 사이 또 더 올라가셨군요... 라고 인정을 해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재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겉치장에 공을 들이고, 행여나 과거의 냄새가 나진 않을지 늘 조심하게 된다. 그가 눈에 띄는 수입 스포츠카를 모는 것도, 와인에 대해 잘 아는 척 행동하는 것도, 최도영을 찾아가 이제 나도 대단하지 않냐며 은근슬쩍 인정을 바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에게 있어 최도영은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존재이며,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의 표준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마도 장준혁은 와인의 향과 맛을 느끼기 위해 와인의 종류는 무엇이 있는지 남몰래 학습하였을 것이며, 상류층들이 향유하는 음악과 미술 등 문화 전반에 대하여 암기하는 데에도 제법 시간을 쏟아 부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브르디외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상류층과 지식인의 문화향유에는 차이가 있는데, 상류층은 도서관에 맞먹는 서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음악회를 열며 예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지식인은 예술을 학습하며 암기하는 방식으로 문화를 접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말이다.

사실 학습하듯 문화를 경험한 이들의 경우, 자신이 배우고 암기한 것을 체계화하느라 바빠 자연스럽게 느끼고 감상하는 여유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그는 막상 예술가나 상류층과 함께하게 되면 겉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더욱 조바심을 내게 된다. 이처럼 그의 부자연스러움과 관계의 삐걱거림은 학습을 통해 이뤄낸 자의 부작용이다. 아버지와 형을 가지지 못한 남자였기에 관계를 위계질서로만 편성할 수 있을 뿐, 아버지나 형과 같은 속성으로 인간관계를 유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필상과의 어색한 형동생 설정을 보라!)

장준혁이 자신만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신감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자는 그래서 공허하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부쩍 황폐해진 지금의 내 삶처럼, 아마도 장준혁 역시 드라마 말미에는 피폐해진 자신의 삶을 추스리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